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쓴 최초 장편소설
'히든페이스'는 살바도르 달리가 쓴 최초 장편소설로,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초현실적인 사랑을 다룬다. 조형 예술의 천재이자 최고 권위자, 초현실주의의 거장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동시에, 스스로를 천재라 일컬으며 평생 겸손이라고는 몰랐던 달리는 '트리스탄 이졸데'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으로 문학 장르에서조차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입증해 냈다.
초현실주의 화가의 글이라는 이유로 달리의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La Vie Secr?te de Salvador Dali)'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던 독자들조차 찬사를 보냈을 만큼, '히든 페이스'는 인생의 씨줄과 날줄로 엮인 초감각적, 비이성적, 영적, 초자연적 세계의 표상들뿐 아니라, 시각 외의 다른 감각 자극에 의해 드러나고 재현된 이미지들 역시 그림을 그리듯 유독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광기라는 외줄을 타던 희대의 천재, 창조 본능을 분출하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죽음을 뛰어넘는 남녀의 위태로운 사랑.
이 소설의 주제는 죽음을 무릅쓴 사랑이다.
그랑드살레 백작을 중심으로 벳카와 베로니카의 플롯, 그랑드살레 백작과 마담 솔랑주의 플롯으로 나뉘어 전개되는 이 소설은 봄이면 부드러운 황록색 새순이 돋아나는 크류 드 리브류 초원의 코르크나무 숲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그랑드살레 백작의 소유였으나, 재정 악화로 숙적 로슈포르의 손에 넘어간 코르크나무 숲은 모조리 베어 없어져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다. 주변의 거대한 삼림과 별개의 땅이 되어 버린 이 숲은 백작의 타락과 멸망을 암시하는 증거물이다.
백작은 이 코르크나무 숲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며 이 땅을 되찾기 위해 애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사교계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공증인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거나, 공증인이 다리를 절룩이며 걷는 모양까지 똑같이 흉내 내는 무절제한 귀족 한량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들,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사랑 놀음에 빠진 귀족들의 이야기는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던 시기를 맞으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5년간 서로를 유혹하려 밀고당기는 연애전을 펼치던 마담 솔랑주 드 클레다는 백작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백작은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클레다를 외면하고, 전장으로 떠나 버린다. 지금껏 사랑을 갈구했지만, 정작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자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백작의 말대로 그는 평생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는” 채 살아간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클레다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백작의 숲을 정성껏 가꾼다. 하지만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채 오히려 학대하는 백작의 잔인함은 그녀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간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솔랑주 드 클레다와 그랑드살레 백작, 존 랜돌프, 베로니카 스티븐스, 벳카 사이에 일어나는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인생 이야기와 연결되어 달리의 철학적.심리적 사상과 언어 심상에 대한 기지를 극적이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된다.
“이것은 시대의 풍조와 자기반성, 개혁, 열정의 체계를 다루는 진정한 글이다.”
속도라는 광기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문학작품에서도 5분짜리 미키마우스 영화나 아찔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낙하산 점프와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겠지만, 시대의 풍조와 자기반성, 개혁, 열정의 체계를 다루는 달리의 이 진정한 소설은 스탕달 시대에 수레에 올라타 유유자적 여행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달리는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발자크풍의 소설을 쓴다느니 위스망스풍의 소설을 쓴다느니 하며 떠든다. 하지만 내 책은 그런 소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철저히 달리적인 소설이다. 내 자서전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 소설의 구조 아래에서 나 자신의 인생이라는 본질적인 신화와 나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언제나처럼 끊임없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는 걸 쉽게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달리의 회화 작품 속에 내재된 모든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그만의 비합리적, 편집광적 분위기는 물론, 현대인의 불안, 공포, 모순, 절망, 비합리적인 상상력, 이미지의 중첩, 의도적인 그로테스크한 공포감 등을 담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의 효과는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독자의 주관적인 상상력으로 다시 한 번 걸러서 체험된다.
풍부한 시각적 언어로 쓰인 이 소설을 영어로 처음 번역한 호콘 슈발리에의 말처럼 “달리가 붓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소설 역시 효과적으로 그렸든 그렇지 않든, 그의 그림에 매혹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가 이 새로운 방식에 온 마음을 다해 몰두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