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서양의 단편영화가 중국에 처음 들어와 월극 극장에서 상영되던 시기부터, 21세기 들어 변화하는 미디어 산업과 중국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홍콩 영화와 TV 산업 100년의 역사적 변천을 총망라하는 문화 산업 연구서. 풍부한 사진 자료와 다양한 영화인들의 인터뷰 자료 및 상세한 자료들을 통해 홍콩 영화 100년의 영광과 쇠락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중국과는 다른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홍콩 영화가 발전해 온 과정을 아시아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흐름과 영화 산업의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아시아 지역의 의제를 문화연구의 장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그린비출판사 '아이아총서' 아홉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영화 산업을 통해 20세기 홍콩을 가로지르다!
스타의 탄생과 아시아 영화인들의 도전, 그 영광과 쇠락!
‘동방의 할리우드’라 불리던 홍콩 영화는 그 자체로 아시아 문화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였다. 이소룡, 이연걸 등의 무협영화는 전 세계에 쿵후 붐을 일으켰고, 1980년대의 개성 강한 뉴웨이브 영화는 어두운 홍콩의 밤거리를 스타들로 빛나게 해주었다. 2004년 홍콩섬 맞은편 구룡반도에는 이처럼 홍콩 영화를 빛낸 영화인들을 기리기 위해 ‘스타의 거리’(星光大道; Avenue of Stars)가 조성되었다. 이곳은 홍콩 영화를 추억하는 수많은 영화 팬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과거의 영광은 이미 쇠하였고 홍콩 영화의 현실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그린비출판사에서 펴낸 『홍콩 영화 100년사』(香港影視業百年)는 19세기 말 서양의 단편영화가 중국에 처음 들어와 ‘신기한 서양 그림’이라 불리며 월극 극장에서 상영되던 시기부터, 2003년 중국 대륙과 홍콩 사이에 체결한 경제 긴밀화 협정(CEPA, Closer Economic Partnership Arrangement) 이후 중국·홍콩 합작 영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홍콩 영화 산업 100년의 역사적 변천을 상세한 자료와 흥미로운 이야기로 집약한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 종보현(鍾寶賢; Po Yin Stephanie CHUNG)은 홍콩 영화사를 연구하는 전문적인 기관도 없던 열악한 상황 속에서, 풍부한 사진 자료와 다양한 영화인들의 인터뷰 자료 및 각종 수치 자료를 성실하게 수집하여 20세기 홍콩을 관통하는 영화 산업사를 한 권에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책은 영화 작품이나 특정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는 여타 영화 관련 서적과 달리, 영화 산업의 각도에서 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을 전부 아우르며 홍콩 영화가 개척해 온 길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홍콩 영화사 연구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노력이 유독 돋보이는 저작이다. 또한, 종보현의 이 책이 중국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정군산」(定軍山, 1905)이 제작된 지 100년 되는 해인 2005년을 앞두고, ‘스타의 거리’가 조성된 2004년 홍콩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의의도 남다르다 하겠다. 미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3대 영화 생산 강국이던 홍콩 영화가 중국과는 다른 홍콩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왜 침체기를 겪고 있는지에 관해 아시아 영화와 문화 산업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홍콩과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도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홍콩이라는 역사적 공간과 영화 산업의 발흥
중국 대륙 남동쪽 끝에 위치한 홍콩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언어·문화·역사적으로도 중국과는 다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안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2014년 홍콩 우산혁명에서도 드러나듯 홍콩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는 중국 사람들과 크게 다르다. 1840년대 영국에 할양되어 1997년 중국에 반환되기까지 홍콩은 중국 대륙의 혼란한 정세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조건은 홍콩에서 영화 산업이 발달하는 과정에도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서양 영화가 중국에 전해진 이후 중국의 영화 산업은 상해와 홍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두 도시는 각기 표준어 영화(國語片)와 광동어 영화(?語片)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상해 문예계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을 둘러싼 좌우파 정치 세력의 충돌이 확산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풍파로부터 영화 산업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욱이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상해가 ‘고립(孤島)시기’에 접어들자 상해 영화인들이 홍콩으로 대거 남하했고, 이후 홍콩의 광동어 영화는 점차 흥성하였다.
하지만 20세기 중국의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홍콩도 아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1941년 홍콩 역시 일본에 함락되었고, 중일전쟁 승리 이후 중국 대륙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다시 격화되면서 상해 영화인들의 2차 남하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1950년대 홍콩에서도 좌우파 영화인들의 대립이 점차 퍼지게 된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홍콩 영화인들은 꾸준히 영화 산업의 활로를 개척해 왔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쇼브러더스’(邵氏兄弟; Shaw Brothers), ‘전무’(電懋) 등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자본의 영화 배급사들이 홍콩에 진출하면서 홍콩 영화의 정치적 색채가 옅어지고 상업 영화가 발전하게 되는 흐름도 홍콩이라는 지역적 공간 속에서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영화 자본의 흐름과 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의 형성
189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에디슨(Thomas Alva Edison)과 뤼미에르(Louis Lumiere) 형제에 의해 촬영기와 영사기가 발명된 이후 이러한 상영 시장의 부산물로 제작된 단편영화가 중국에 들어왔고, 이를 상영하기 위한 극장들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초기의 영화 상영업자 노근(盧根)과 나명우(羅明佑) 등은 처음에는 유럽과 미국으로부터의 영화 공급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영화 제작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세계대전 발발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영향으로 영화 수급이 어려워지자 공급량 확보를 위해 홍콩 현지의 영화 제작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영화 산업의 발전에서 안정적인 영화 공급과 상영 경로를 확보하는 것은 늘 중요한 화두였고, 이는 투자 자본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홍콩 초기의 영화인 여민위(黎民偉)와 이희신(利希愼) 등은 이와 같은 영화 제작과 상영의 합작을 통해 아마추어 단계의 홍콩 영화가 산업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으며, 이후 홍콩 영화의 발전사는 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 광동어 영화와 표준어 영화의 생존 전략
전후 홍콩 영화 시장에서 광동어 영화는 소규모 독립 제작 형태로, 표준어 영화는 보다 조직적이고 규모 있는 스튜디오 방식으로 생산되었다. 국민당의 영향으로 홍콩 영화의 대륙 시장이 상실된 상황에서, 제작비가 많이 드는 표준어 영화는 제작비 회수가 어려웠던 반면 광동어 영화는 동남아 시장을 무대로 삼아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지의 ‘선매수금’(賣片花)으로 영화 제작을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황비홍」 시리즈의 출현은 이 시기 광동어 영화가 독특한 남방 전통을 발전시켜 동남아 시장의 매표수입을 공략하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이는 이후 홍콩 무협영화의 서사 전통이 되었다. 이처럼 1950~1960년대 동남아 핫머니의 유입으로 광동어 영화는 급성장했지만 한편에서는 소자본 대량 생산으로 영화를 마구 제작한다 하여 ‘칠일선’(七日鮮, 7일 만에 영화 제작이 완료된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광동어 영화의 쇠락과 표준어 영화가 성장하는 과정 역시 자본의 흐름과 영화 산업 환경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읽을 수 있다.
표준어 영화 붐은 ‘전무’와 ‘쇼브러더스’라는 양대 자본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 이들은 선매수금의 형태가 아니라 직접 영화 제작에 투자하여 제작·배급·상영의 3대 고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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