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페미니스트로서가 아닌 사유하는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를 제대로 읽는다 인간의 위풍이 이토록 찬란하게 선언된 시대도 없었지만, 이처럼 끔찍하게 우롱당하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인생을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어떤 조건에서 살고자 하는가. 존재의 부조리와 직면했을 때 현대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험가? 열정적인 사람? 진지한 사람? 지식인이 될 것인가? 가치가 없을 때 가치는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어떻게 무無에서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을 채택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보부아르는 독자들에게 인간 조건의 절대적인 부조리와 마주하도록 하며, 나아가 독자들로 하여금 혼돈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창조할 수 있도록 애매성의 변증법으로 이끈다. [출판사 책 소개] 『제2의 성』에 이은 보부아르의 역작 이 책은 『제2의 성』에 이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작품 목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윤리체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직후인 1945년의 강의에서 촉발되었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마지막 부분에서 윤리학에 관한 집필을 의도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메모만을 적어놓은 채 완성하지 못했다. 다음 해, 그녀는 장 폴 사르트르가 창간한 『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 잡지에 앞서 강의한 내용을 6개월에 걸쳐 연재하는 도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1947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작인 『모든 사람은 혼자다』의 연장선상에서 실존주의적 윤리학을 펼치려는 시도이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유와 책임, 그리고 삶의 진정한 애매성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인간이 현재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우연성에 있다고 믿는다. 또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는 가치 기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은 타인들이 자유로울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실존주의적 관념을 펼쳐 보인다. 실존주의의 철학적 인식을 바꾸다 존재의 부조리와 직면했을 때 현대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모험가, 열정적인 사람, 근엄한 사람, 지식인이 될 것인가? 가치가 없을 때 가치는 어디서 나올 것인가? 어떻게 무無에서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을 채택하는 것이 더 쉬울까? 보부아르는 독자들에게 인간조건의 절대적인 부조리와 마주하도록 하며, 나아가 독자들로 하여금 혼동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창조할 수 있도록 애매성의 변증법으로 이끈다. 이 책은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근대적인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매우 독특하며 그들의 작품에 환원되지 않는 뛰어나면서도 고유한 작품이다. 이 책은 기존에 알려진 많은 철학적 인식들을 바꾸는, 실존주의 입문 과정에서 가히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애매성을 통해 타인의 자유와 나의 자유을 묻다 용기를 내어 이 책을 펼친 독자는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된다. 특히 가족, 학교, 회사, 국가의 참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의 행복을 희구하는 사람에게 꽤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행복한 삶이란 남이 뭐라건 상관하지 않고 제 좋을대로 사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란 혼자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면서 살 수는 없다. 더구나 나만이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저마다 자유를 주장할 경우 충돌은 자명하다. 그때 타인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제한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나의 자유를 실현하려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자유의 실현은 오히려 억압과 구속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처한 사실적 존재 상황이다. 보부아르는 이것을 애매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지만 이 보편적 자유의 사실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지 않게 되는 애매한 존재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이것은 자유의 추구를 인간적 삶의 징표로 삼고 있는 사르트르적 실존주의에서는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사실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는 존재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뿐, 행위의 문제는 소홀히 하고 있다. 이 점은 사르트르의 중심적 사상이 담긴 『존재와 무』에서 잘 나타난다. 도덕의 문제는 천 페이지를 넘는 이 책의 말미에서 전망이라는 관점으로 소략되는 정도다. 이후 사르트르는 가치의 문제를 다룬 글들을 남겼지만 이것이 『존재와 무』의 입장과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는 여전히 해명 과제로 남아있었다. 참여의 윤리학이자 상호주체적 윤리학을 제시하다 보부아르는 2차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전체주의에 의해 자행된 자유의 부정은 오직 타인의 것만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나의 자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내 고유한 실존을 방해하였다. 타인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자유로운 나의 일상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 옆방의 이웃이 나치에 의해 끌려가더라도 나는 여전히 티타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외면은 결국 나를 고립시키며, 나의 대자적 의식은 방금의 외면을 질책하고 나선다. 이런 질책 속에서 나는 어느새 자기에게도 경멸받는 인격이 되고, 결국 천박한 자유인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나는 자유로운 인격으로 실존하는 길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달리 주체들 간의 자유가 양립 가능하다는 입장을 애매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와 타인 간의 대립적 관계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보부아르는 나와 타인의 관계가 대립인 동시에 화해이며, 자유의 관계이자 억압의 관계이고, 이 둘의 역동적 교차가 이루어지면서 자유가 성립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자유를 위해 나 스스로 개입하고, 그것의 결과를 고뇌하는 보부아르의 윤리학은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유아론적 윤리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키고 주체로서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의 윤리학이자 상호주체적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