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을린 우주
여름 키코/ 베케이션 빛/ 가까운 내면/ 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 덴마크 입국소에서/ 론드리
2부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July/ 언덕 없는 이별/ 이스키아 이스끼아/ 붉은 유령/ 스웨터 침엽수림/ Port of Call/ 검은 겨울/ 쇼스타코비치의 숲
3부 빨래가 타는 장면
발로―v에게/ 컬렌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 밝은 방/ 오로라 털모자/ 료, 메멘토 트램Memento Tram/ 뮤리얼 벨처 양, 세 개의 습작/ 아웨나무에 부쳐
4부 함께한 여름의 사진을
사랑의 알브트라움Albtraum/ 여름의 화음/ 거미숲/ 모국의 밤/ 비 오는 동유럽, 신체의 방/ 블랙 파라다이스 로리/ 올리브나무 랑랑Ⅰ/ 올리브나무 랑랑Ⅱ/ 로스트 밸런타인/ 천엽벚꽃/ 팔월 모래 무덤
5부 프런트front
물에 비친 얼굴/ 모티바숑motivation/ 수분/ 옆자리 약혼자 키나/ 심연의 아침/ 흔들리는 의자에 앞치마를 걸어두면 푸대의 장미들이 하늘을 물들이지/ 요정극/ 해변 아닌 곳에서/ 낙선전 후 테오 군에게/ 가죽 교향곡/ 비간 시티 거리에서/ 물에 비친 얼굴
해설_진실의 코
양경언(문학평론가)
여름 키코
주하림 · Poem
1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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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시인선 176. 주하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기존에 시인이 축조한 욕망과 감각, 이국과 이종의 시세계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이는 동시에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것임을 알리듯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변해온 궤적을 가늠해보게끔 한다.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던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촉을 관망하는 대신 그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노라 외치며 새로운 계절을 그려 보인다. 시집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 그 자체이다.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써 감각되는 주하림의 시 속 여름은 조금 기괴한 분위기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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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Table of Contents
Description
“손에선 늘 소금 마늘 레몬 냄새가 나고
이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어”
기괴하고 아름다웠던 지난 여름을 허물고
그 잔해로 지어 올리는 새로운 여름의 시
문학동네시인선 176번으로 주하림 시인의 두번째 시집을 펴낸다. “말하려는 바를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능력과 의지가 돋보인다”(심사위원 박형준 진은영 신용목)는 평과 함께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 2013)을 통해 “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한, “맨몸의 아름다움”(문학평론가 황현산)을 지닌 언어로써 “길들여지지 않는 다중적인 욕망”을 “생생한 자기의 드라마로 만들어 내놓았”(시인 박형준)다는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시인이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써내려간 시들 가운데 44편을 선별해 묶은 『여름 키코』는 기존에 시인이 축조한 욕망과 감각, 이국과 이종(異種)의 시세계를 인상적으로 펼쳐 보이는 동시에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변해”(「스웨터 침엽수림」)가는 것임을 알리듯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변해온 궤적을 가늠해보게끔 한다.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레드 아이」,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던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촉을 관망하는 대신 그따위 “엉터리 천국은 나도 만들겠”(「몽유병자들의 무르가murga」)노라 외치며 새로운 계절을 그려 보인다.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_「여름 키코」 부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계절 그 자체이다. “한 편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영화”(「덴마크 입국소에서」)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로써 감각되는 주하림의 시 속 여름은 생명이 약동하고 파도가 너울대는 ‘지금 이 순간’의 계절이 아니다. 여름은 지난날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피로 얼룩져 끈적거리고 썩어가는 것들로 가득차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조금 기괴한 분위기”(「컬렌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의 계절이다.
주하림의 여성 화자들은 그 여름에 그들이 겪었던 사건을 다시금 가져와 증언한다.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여름 키코」), “그가 여자를 죽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Port of Call」), “집안 물건들이 부서졌고 그녀 날개도 피투성이가 되었죠”(「팔월 모래 무덤」) 등의 구절에서 짐작되듯 사건이 인물들에게 끼친 세기가 만만치 않아 보임에도, 그들은 그 기억에 잠식되지 않고 사건 이후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짚어 보인다. “긴 흑발의 언니”는 이제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으며, 졸업식 사진의 프레임 너머로 하반신을 잘려나가게 했던 “종아리 화상”은 “벚꽃 잎처럼 보인다”(「여름 키코」). 미술학교에서 ‘정신병자’로 불렸던 또다른 ‘언니’는 그럼에도 끝내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고(「덴마크 입국소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이 잘린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왔던 ‘나’는 자신과 같은 시간을 보냈던 이를 데리러 고통이 묻어 있는 거리로 나선다(「비간 시티 거리에서」).
창이 그리워 생트샤펠성당에 갔어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굴절된 빛들이 창을 통과하고 갑자기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왔던 일을 그것이 쏟아지는 것을
_「모티바숑motivation」 부분
그러므로 “희미하지 않게 아름답게 용기 내어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고맙다”라는 ‘시인의 말’은 더욱 귀중하게 느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떠올라/ 다른 이의 힘을 더해 육지에 이를 수 있었”(「심연의 아침」)다고 말하는 주하림의 화자들은 “주어진 곳에 머물지 않고 더 먼 장소로 나”(문학평론가 양경언)아갈 것이며, 여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색색의 빛 색색의 타일”(「론드리」 「July」)이듯 『여름 키코』를 통해 주하림이 만들어낸 새로운 여름은 지난 여름이 허물어진 자리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공원에서 터진 입안을 헹구고
어두웠다 천천히 빛으로 가득해지는 장면처럼
초여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네가 평온하게 돌계단 아래에 기댄다
_「천엽벚꽃」 부분
「여름 키코」의 ‘키코’는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연의 아침」에서 ‘나’ 또한 키코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일들”에 “끝장을 내자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 다른 편에 선다. ‘나’는 여전히 “끔찍했던 일들”의 이후를 겪어내는 중이다. 그 일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게 만들지만, ‘나’는 ‘나’가 가라앉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나’ 는 심연에서 “내 힘으로” 떠오름으로써 어떻게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히고 서서히 부패하게 만드는 외압을 뚫고 “목구멍 깊숙이 숨은 나”를 건져올리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시에서 ‘나’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우스꽝스럽게 짚고 올라갈” “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기로 한다. 지나간 일과 내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짊어지기로 한다. 날로 희박해져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섭도록 정직한 방식으로.
_양경언, 해설에서
◎ 주하림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안녕하세요, 첫번째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이후 구 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셨는데요.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시를 쓴다고 말해도 제 시를 자세히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제 시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으리란 절망 속에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럼에도 어떤 날은 제 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거나 인터넷에서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어요. 시집을 묶으면서 제 시를 기다려준 그들을 떠올렸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준 분들께 처음이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Q2. 두번째 시집 『여름 키코』는 제목에서부터 첫번째 시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요.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 시집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다만 이제는 조금 더 제 색깔이 분명해지고 뚜렷



편식
3.0
당신은 원래 천사였으면서 사랑이 어떤 건지도 모르네
Jzzz..
3.0
• 발로 -v에게 생각은 늘 미래에 가서 이별을 떠올렸다 지옥은 늘 며칠 걸린다 며칠을 그렇게 보낸다 갑자기 맑은 날이 찾아와 그 심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가져가버리기도 하고 내 전부이던 너에게 지옥은 며칠뿐일 테니 그 며칠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대신 겪는 지옥이 있다 당신은 원래 천사였으면서 사랑이 어떤 건지도 모르네* 지옥에 맞서줄 상대를 찾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하나에 빠져 있던 마음 매번 속더라도 쥐어야 하는 꿈 등뒤로 구름이 흐르고 지옥까지 가기에 우리 악력은 너무 약했다 *모리야마 에나, 「이 사랑은, 이단 1」, 학산문화사, 2018.
예지
3.0
네가 나의 나라니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같은 방에 들어가면 그날부터 여름이야
수연
3.0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 마지막 여름 당신이랑 있으면 진정이 안 돼요 키스보다 자꾸 얼굴을 바라보게 돼 - 거미줄처럼 가늘고 불면 날아가는 관계 고작 그런 것 속에 불면 날아갈 듯 외로웠던 네 마음이 내게 온 거라고 부탁도 명령도 들어줄게 꽃 알레르기가 멈출 때까지 약을 먹고 너의 꿈속에서 살인을 멈추지 않으며 너의 스물셋 봄이 보여줄 마술을 기다려 - 사랑이란 발밑에 쏟아놓은 소금이나 검은깨처럼 하나만 염두에 둘 수 없는 거겠지
예나
3.5
거미줄처럼 가늘고 불면 날아가는 관계 고작 그런 것 속에 불면 날아갈 듯 외로웠던 네 마음이 내게 온 거라고
김단아
4.0
시인의 말 나는 그냥 행복하네 달려도 달려도 올리브 나무가 보이는 곳에서 삶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날아오르네 매일이 꿈꾸고 내일이 즐거워 우리가 파랑을 너무 사랑하니까 나는 그것에 맞춰 춤출 수 있네 무한 속에서 희미하지 않게 아름답게 용기내어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고맙다
a-ori
3.0
p. 11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여름 키코) p. 18 얼마나 벌어야 너랑 살 수 있을까 / 파도 위의 서퍼들 /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물결 / 네가 내 마음에 들려고 노력을 많이 했나봐 / 입에서 짓무른 복숭아 냄새가 나거든 / 젊은 날의 조코비치처럼 / 태양 아래 조코비치처럼 (몽유병자들의 무르가) p. 27 낫 러브 떠나지 않는다 더위에 잠든 개 새벽까지 키스를 나눈 뒤 / 너를 작은 목화차 모임에서 다시 만난 일 외출 때마다 뿌린 퍼퓸 향 / 사시나무 입사귀들이 은빛으로 나부낀다 /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망종이라는 말 들어봤어? / 너에 대한 거……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게 마음이 아니라 그해 여름 미친듯이 퍼붓던 비를 맞으며 끝났는데 큰 창이 있는 방에서 벌어진 일들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사원 수영장 물속에서 / 갑자기 이 시간들을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너는 한없이 다정해 / 보름 전 내 머리색은 더 짙었고 / 수영장 바닥 기포가 펑펑 터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 봐 흙탕물에 뭔가 움직여 돌아가는 길 노래는 듣지 말걸 수업에는 언제 올 거야 같은 반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좋아하는 말을 들어야 끝나나봐 너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한다 고작 그것이 우리 시간이 보여준 영원이었는데 / 빈 물병을 다리 아래로 던진다 (July) p. 39 좋아하는 나라를 물으면 당신은 내가 있는 곳이 국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도 당신이 내 국적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말실수로 이방인들은 전쟁 포로가 되니까 (검은 겨울) p. 44 생각은 늘 미래에 가서 이별을 떠올렸다 / 지옥은 늘 며칠 걸린다 / 며칠을 그렇게 보낸다 / 갑자기 맑은 날이 찾아와 / 그 심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가져가버리기도 하고 / 내 전부이던 너에게 / 지옥은 며칠뿐일 테니 그 며칠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 내가 대신 겪는 지옥이 있다 당신은 원래 천사였으면서 사랑이 어떤 건지도 모르네 / 지옥에 맞서줄 상대를 찾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처럼 /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 하나에 빠져 있던 마음 / 매번 속더라도 쥐어야 하는 꿈 / 등뒤로 구름이 흐르고 / 지옥까지 가기에 우리 악력은 너무 약했다 (발로) p. 57 너랑 할 때 몸이 상했었잖아 영혼에서 악취가 난다는 둥 더 젊을 때는 꿈이나 미래 좇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 대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갈색 나방의 공격을 받곤 했어 외출 시간이 길어지면 침대 구석에서 나방은 몸집을 늘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계속 의식되었다 손등에 적는 올해까지 살자, 올해까지만 살자 정신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내 꿈은 얼마나 널 더럽혔는지 얼마나 내 꿈을 더럽혔는지 바지 속주머니를 털면 애초부터 작고 홀로였던 빈방들이 쏟아지곤 했어 너에게 닿으려 했던 내 몸은 항상 앙상했잖아 몸에 나무를 키우고 있었던 거야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지 않으려던 나무는 무척 지쳐 있었지 이미 오래전에 떠난 네가 흘려주는 고름을 받아 마시며 어느 날 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했을 때 절벽에 매달린 내게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그토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손톱에 낀 살점, 누구든 붙잡아주리란 심정 이대로 녹아 별이 되겠다는 날들이 나를 관통했습니다 손등에 적힌 글씨 따위 지워진 지 오래였고 너를 꺼내 나는 울고 있었습니다 불안으로 덧칠된 습작, 죽어간 시간에 매달린 열매들 훗날 떠올린 나락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뮤리얼 벨처 양, 세 개의 습작) p. 59 언제나처럼 먹구름을 몰고 와 나아질 수 있으리란 말을 듬성듬성 꺼냈습니다 열정적인 속도로 지식을 채워가는 일 관심을 끊었습니다 / 그저 부족하나 학습에 초조해지는 것은 아마도 야망 / 언젠가 미쳐 날뛰는 말을 본 적이 있으며 저 또한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꼬리가 달린 짐승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추억하는 일 서로에게 의지를 알려주었고 먼 훗날 어떻게 배신할 것인가…… 침묵하다 빠져나온 샌드위치 양상추를 씹었죠 초파리떼를 쫓고 무른 과일을 베어먹으며 선생님 또한 제가 만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셨으면 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행한 도구나 불행의 도구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완벽에 대한 것들이 인간을 어둡게 만들지 않던가요 /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들이 모여 글을 쓰고 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모임을 갖고 허리 싸움을 지켜보며 (아웨나무에 부쳐) p. 69 흔들리지 않는 꿈 그것은 언제나 나를 흔들던 여름 /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어지는 상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모국의 밤) p. 82 맛있는 저녁 냄새가 흘러나오는 대문 / 어떤 그림자가 기웃거린다 / 초여름, 꺼진 소파에 엎드려 / HBO 드라마를 보다 / 가족 누군가 좀비가 되어 방문을 열고 나와도 / 놀라울 리 없는 집을 잠시 나온 개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공원에서 터진 입안을 헹구고 / 어두웠다 천천히 빛으로 가득해지는 장면처럼 / 초여름,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네가 평온하게 돌계단 아래에 기댔다 (천엽벚꽃) p. 88 여름뿐인 영화 / 해안을 따라 달리는 파란색 덤프트럭 / 갈고리 모양의 상처 / 태양이 지지 않는 백사장 / 달려오는 땀에 젖은 사내 /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청년의 미소 회색 티셔츠가 진회색이 될 때까지 뛰어온 청년은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다 내가 너에게 보여준 것은 약간의 빛 보풀이 인 클로버 팔찌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들 아니 너무 긴 회색의 어둠 어느 날 너는 손전등처럼 축축한 그 안을 구석구석 비췄는데 마음이 커져가도 끝나도 너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내 나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싱크대뿐인 부엌에 서서 말한다 / 네가 나의 나라니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 우리가 같은 방에 들어가면 그날부터 여름이야 / 사진을 남기자고 말한다 / 신에게 더는 되묻지 않는 질문들이 우기로 왔다 가고 / 내리쬐는 빛 아래 / 젖은 빨래 뭉치를 안고 찍은 그해 사진을 / 빨래가 타는 장면 / 불에 덴 내 손가락을 너는 입에 갖다댄다 /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 손님이 왔나봐 가만히 있어봐 너는 붉어진 손가락을 입에 물고 / 한 팔로 불을 끈다 / 빨래가 넘치고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문고리 잠금장치가 느슨해서 틈으로 내부가 보일 것 같다 내부가 흔들린다 우리가 키스하는 장면에서 (물에 비친 얼굴) p. 92 개는 이제 없는데 개가 물 먹는 소리가 난다 / 이십대가 기억나지 않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 분수가 있는 광장, 달려가면 얼굴로 빛이 쏟아진다 / 몸으로 들어온 빛이 흰 나무로 뻗어나가는 동안 / 몸이 수천 개로 갈라지는 상상을 한다 (수분)
sse
5.0
어떤 문장들은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마저 머뭇거리게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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