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호주제의 유산: 가족신분사회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한국사회의 성차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호주제는 한국의 전통문화나 미풍양속이 아닌 식민지 기간 일제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1947년 일본이 호주제를 폐지한 이래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존재해 온 가족법 체제였다. 가장에게 가족 내 친권과 재산권 등을 독점케 하고 그것을 남성 직계비속에게 우선 세습하는 호주제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의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장면들을 수없이 만들어 냈다. 호주제 폐지로 법적인 호주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유산은 민법과 사회복지제도, 여타 수많은 법제도에 남아 변함없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이성애 규범성을 따르는 ‘정상가족’의 구성을 통해 사회적 ‘신분’을 획득할 것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건강가정기본법과 민법이 정의한 대로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관계만이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관계는 자격을 얻지 못한 채 불평등과 차별, 낙인을 경험한다. 성별이분법적인 젠더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제도는 이와 불화하는 존재를 제대로 포착조차 하지 못한다. 호주제 폐지의 핵심을 사회적 신분의 철폐로 본다면 그 기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한국사회를 ‘가족신분사회’라고 명명한다. 포스트 호주제의 과제: ‘가족’에서 ‘가족들’로 이 책은 호주제 폐지 이후 20년간의 한국가족정치를 돌아보며,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인구 구조와 가족 구성을 살핀다. 13명의 필자는 각자 자리한 현장에서 생성된 의제들로 가족정치의 장면을 분석한다. 이미 한국사회에는 정상가족과는 다른 방식의 생애 모델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출현해 있다. 이렇듯 이성애 규범적인 관계성을 교란하며 차별적인 가족제도에 대항하는 ‘다양한 가족’에 필자들은 주목한다. 특히 트랜스젠더, 아동‧청소년, 한부모여성, 결혼이주여성, 비혼여성, 장애인, 동성 부부, 1인 가구 등 소수자의 관점에서 ‘가족’을 끈질기게 질문한다. 기존의 가족제도로부터 억압되고 추방된 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돌봄, 친밀성, 연대의 장이 새로운 사회를 추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돌봄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관계는 “가족신분사회 너머의 세계”를 현실로 이끌어 내고 있다. 지금까지 가족다양성이란 말은 ‘취약가족’이나 ‘위기가족’의 완곡한 표현에 가까웠지만, 이제 진정한 의미의 ‘가족다양성’이 이뤄질 때가 다가온 것이다. 가족신분사회 너머의 세계로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다음 네 개의 질문으로 구성된다. 가족은 왜 신분이 되는가, ‘정상가족’을 벗어난 시민의 삶은 가능한가, 삶과 죽음은 어떻게 가족정치의 의제가 되는가, 새로운 결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질문들은 가족/신분제도로 인해 빈곤과 불평등, 차별을 경험한 수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질문은 그 자체로 문제의식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동력이다. 호주제와 관련한 지난 수십 년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년 전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 낸 이들의 연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계속 확장하고 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연대의 한 부분이다. 누구나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가질 수 있고 가족이 아닌 개인으로서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가족신분사회 너머의 세계’를, ‘모두’가 함께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