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너무 자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의 자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건들의 역사
겉으로는 나라의 장기적 미래를 생각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눈앞에 닥친 선거에서 이길 생각만 하는 정치인들, 위기가 닥치면 그제야 나타나는 벼랑 끝 정책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정치적 문제에는 야단법석을 떨지만 근본적 문제는 간과하는 사람들.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각종 회의와 위기론은 모두 이런 민주주의의 속성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민주국가는 또한 늘 위기를 “그럭저럭 넘기고”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정치체제로 살아남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론자들은 민주주의 덕분에 전쟁도 경제 위기도 극복하고 평화와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독재나 전제정에 대한 민주주의의 상대적 우월성에서 더 나아가 “최종적 승리”를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어찌 보면 흔해 빠진 논의 중 하나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 해답 역시 흔해 빠진 논의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통찰을 지닌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토크빌이었다. 토크빌은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이런저런 장점이 동시에 단점이라는 걸, 또 이런저런 단점들이 동시에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처음으로 포착해 낸 인물이다. 케임브리지대 정치학과 런시먼 교수는 바로 이와 같은 토크빌의 통찰을 빌려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던 “결정적” 순간들을 분석한다. 세계대전과 대공황, 냉전과 쿠바 미사일 위기, 오일쇼크와 2008년 경제위기, 그리고 트럼프 당선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분석하는 “결정적” 순간들은 모두 이런 역설을 드러내는 순간들이다. 이를 통해 런시만은 민주주의가 위기에서 회복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은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위기를 피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계속 극복해 오면서 어떤 위기가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실은 자만)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근본적인 문제에 눈감고 현실에 안주하는 “자만의 덫”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치학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의 신선한 통찰과 광범위한 20세기 역사를 독창적 기준에 따른 ‘위기’의 역사로 흥미롭게 재구성해 내는 과감한 필치, 그리고 블랙 유머 속에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살려 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 민주국가들에겐 특별한 패턴이 있다: 자만의 덫
런시먼은 지난 백 년간 가장 결정적이었던 민주주의 위기의 순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 역사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해 왔음을 증명한다. “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자만(안주), 어쩌다 얻은 승리, 당대의 도전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반복. 민주주의는 그 특유의 적응성, 유연성으로 인해 위기에서 회복하는 능력은 융통성 없는 전제국가들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될 것이라는 ‘자만’으로 발전하고 ‘위기가 닥쳐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주해 문제를 점점 더 악화시킨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 곪아 터져 거대한 위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위기를 맞은 민주국가들은 특유의 ‘적응성’으로 생존에 성공한다. 그러면 자신감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만의 덫이다.
* 정치적 삶은 패러독스다 : 우연과 혼란의 20세기 정치사
런시만에 따르면 정치적 삶은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실패가 합쳐져 성공을 만들고, 성공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실패일 수 있다. 민주국가들에는 스캔들과 재앙, 위기가 끊이지 않는데 어느 순간 보면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보인다(부분적으로 이는 24시간 위기를 외치는 언론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런 작은 실패와 위기들이 민주주의가 정도를 걷는 방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의 워터게이트와 1970년대 유럽을 예로 들어 보자.
거의 2년을 이어져 온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1974년 절정에 달했다. 범죄 혐의가 확실해지고 탄핵이 가까워 오자 결국 닉슨은 사임을 발표했다. 모든 스캔들이 그렇듯 ‘위기’에 관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의 이중성과 피해망상이 드러나자 민주주의가 발가벗겨지고 썩은 밑동이 드러난 것 같았다. 스캔들은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1974년 5월, 서독에서는 빌리 브란트가 최측근 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밝혀져 사임했고, 이탈리아에서도 총리 루모르가 뇌물 수수 및 부패 혐의로 물러났으며, 일본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토건 비리와 록히드 사로부터의 뇌물 수수, 불륜 스캔들로 물러났다.
당시만 해도 이들 국가는 재앙적 상황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너진 민주국가는 없었다. 지도자를 내친 이 민주국가들의 공통점은 통치 체계까지 내치진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스캔들에서 지도자가 물러나는 과정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이런 절차는 민주주의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불만과 불안의 배출구가 되었다. 런시먼에 따르면, 민주국가들은 심각한 위협에도 결코 그 위협에 걸맞은 수준의 대응(긴급조치 선포나 체체 전환)을 하지 않음으로써 살아남았다. 반면, 당시 체제를 뒤흔드는 진정한 위기가 꿈틀대고 있던 곳은 바로 자신들의 실패를 자백하지 못하던 공산주의 정권들이었다. 당시 불만을 덮어버린 동유럽 국가들은 15년 상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1917년의 프랑스와 독일을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다. 당시 프랑스의 경우, 1년간 네 명의 수상이 거쳐 갔다. 그것은 극도의 혼란 상태로 보였지만, “제대로 된 인물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클레망소에 안착했다. 반면 당시 독일엔 루덴도르프가 있었다. 그는 어떤 민주주의에서도 불가능한 결단력 있는 문제 해결사로 환영받았다. 하지만 1년 후 루덴도르프가 바닥을 드러냈는데도, 비민주국가 독일은 그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민주국가들은 특유의 혼란스럽고 때론 희극적인 방식으로 비틀거리며 올바른 답을 향해 나아간다. 전제국가들은 거대한 목적을 향해 뚜벅뚜벅 행진해 갈 수 있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곳은 절벽일 수도 있다.
* 민주주의 숙명론의 위험 : 변화를 원하지만 당장은 아닌
“위기와 위기 극복, 그리고 현실 안주”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런 패턴을 알고 있는 데서 ‘현실 안주’의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게다가 이 문제는 경험이 쌓여갈수록 더욱더 심해진다.) 결국은 다 잘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진짜 나서야 할 때를 잘 구분할 수 없고, 또 정작 그럴 때 행동하지 못한다. 진짜 위기를 나타내는 경고음이든, 가짜 경보음이든 모든 경보음이 똑같이 신경과민의 소리로 들린다. 24시간 내내 ‘위기’라고 외치는 미디어와 각종 불협화음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가장 전형적인 가짜 위기는 ‘선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걸 차단해 버리고 진짜 중대한 위기가 오면 알게 되겠지 안주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숙명론적 경향은 일찍이 토크빌 역시 포착한 바 있다. 런시먼은 당시 토크빌이 관찰한 미국의 증기선 조선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온다. 토크빌은 거의 항상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빠진 증기선을 타고 다니다 익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 토크빌은 조선사들에게 왜 배를 더 튼튼하게 만들지 않는지 물었다. 이유는 “항해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자신의 배로도 조만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바로 오늘 필요한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민주국가 국민들은 자기 체제의 장점을 잘 알고 있기에 “열정적이면서도 체념적”이다.
2008년 경제 위기를 예로 들어 보자.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버냉키의 전공은 대공황이었다. 2002년 그는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