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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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언어가 전후의 일본을,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군중 앞에서 한 신사가 사뭇 자연스럽게 모자를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누가 저 많은 사람을 모았으며,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자랑스레 무수한 군중 앞에 서 있는가. 바로 1947년 12월 7일,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도시 히로시마를 방문한 히로히토와 그를 환영하는 일본인들이다. 패전 후에도, 일본인들은 여전히 천황의 신민이었다. 현대 일본과 전쟁이라는 ‘체제’가 얼마나 깊이 결합했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역사적 장면 중 하나다. 전후에도 전시의 일본은 남아 있었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일본 사회의 모순에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인 오구마 에이지는 이미 몇 권의 책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났지만, 현지에서 공히 인정받는 그의 주저가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구마 에이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쓰루미 슌스케를 비롯한 사상가들부터 조종사 사카이 사부로 같은 과거의 일본군 병사들과 평범한 학생 이시카와 사쓰키까지 전후 일본을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대작 『민주와 애국』에서 현대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구축해 냈다. 지난 5월 1일 일본에서는 30년 간 재위했던 아키히토가 퇴위하고 나루히토가 새 천황에 즉위하면서 특유의 기년법인 연호(年號)도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아베 신조 수상은 “(이 자리는)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평화롭고, 희망 넘치고, 자부심 있는 일본의 빛나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결의”라고 밝혔다. “아름다운 평화”를 뜻하는 새 연호 아래서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위대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행보는 분명 모순적이다. 『민주와 애국』은 사상의 언어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의 전시 체제가 전후 체제로 재구성된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과정을 세밀하게 파헤쳐 냈다. 이 책에 따르면 자민당과 아베 수상의 정치적 모순은 일종의 필연이다. 전후 일본의 보수 세력의 태두인 요시다 시게루는 패전 직후 수상으로서, 미국의 압력을 받아 전후 헌법에 비무장주의를 수용했으며 국민들에게 그 이상(理想)의 훌륭함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이 책은 요시다가 이미 그 당시부터 언젠가는 일본이 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음을 지적한다. 결국 세계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과거의 식민 지배를 직시, 사과하지 않고 정치적·군사적 갈등을 조장하는 현재의 일본 사회와 정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70여 년 전의 패전 직후 일본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전쟁 중의 일본을 알아야만, 군국주의가 남긴 언어와 체제를 이용해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던 패전 직후의 일본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주변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국의 일방적인 내셔널리즘을 강변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려면, 전시와 전후를 가로지르며 변천해 온 일본 현대 사상의 언어들을 집대성한 이 책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분량이 방대한 학술서임에도, 전후 일본사에 이름을 남긴 다양한 인물들의 흥미로운 단면들을 전후사상의 흐름과 적절히 조화시켜서 독서의 즐거움을 더한 저자의 필력도 인상적이다. “단언컨대 전후 일본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정치, 역사, 사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 책의 견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여기 등장하는 인물 및 논쟁, 사건들을 비롯한 역사적 흐름이, 전후 일본을 논하는 기본적인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옮긴이 후기」에서 같았지만 달랐던 전후의 언어들, 전후는 끝났는가 이 책은 전후(戰後) 일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들인, 제1의 전후와 제2의 전후라는 두 개의 전후, 전후 민주주의의 언어, 그리고 언설과 심정에 대해 설명하는 「서장」으로 시작한다. 일본의 전후 사상사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저자의 치밀함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두 개의 전후’다. 이 개념은 1955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인 제1의 전후와 그 이후인 제2의 전후를 나눈 것이다. 1955년 이전의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독립한 여느 신생 국가와 같은 후진국이었으며, 패전으로 기존 체제가 붕괴하면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반면 제2의 전후에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덕분에 일본 경제가 전쟁 전의 수준을 급속히 회복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체결, 보수 세력의 자민당과 진보파의 사회당 등으로 대표되는 55년 체제의 수립으로 일본은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 국가 정체성 역시 서구 선진국과 같은 반열에 도달했다고 간주되었다. 패전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제2의 전후가 그 이전의 전후와 나뉘었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민주와 애국을 비롯한 현대 사회의 주요 개념들은 시대에 따라 상이한 심정(心情)과 경험을 표상하게 되었다고 이 책은 서술한다. 게다가 전후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전쟁 전과 전쟁 중의 경험을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두 개의 전후를 가로지르며 변천한 언어에는 그들의 전쟁 체험도 반영되었다. 이 책이 민주, 애국, 근대, 시민, 국가와 같은 공공성을 둘러싼 언설들과 그 속에 담긴 심정의 흐름을 추적한 것은, 그것이 전후 일본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식인의 사상이 동시대에 집단적으로 공유된 심정과 무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언설 구조의 변동에 이바지하는 지식인은, 말 쓰임의 전문가로서 집단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빚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은 저명한 전후 지식인들의 논조와 함께 정치인이나 일반 민중의 목소리를 동시에 검증할 것인데, 양쪽 모두가 동시대의 공통 기반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종종 언급할 것이다. -본문에서 ■‘천황 만세’를 대신하는 반전과 평화의 헌법 1부에서는 전쟁 직후인 ‘제1의 전후’의 언어 체계가 태어난 경위를 검증한다. 1장 「윤리의 초토화」에서는 두 개의 전후를 포괄하는 전후사상의 근원이 된 전시의 사회 상황을 개괄한다. 일본 제국의 상층부가 보인 비효율성과 난맥상부터, 젊은 지식인들이 체험한 불합리한 병영 생활, 서민들과 어린이들이 군수 공장과 농촌의 집단 피난지에서 겪었던 고난까지, 전후의 일본인들이 언어에 담고자 했던 심정의 근원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다음 2장부터는 전시사상의 언설을 변용하여, 전후의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려 했던 노력들을 중시한다. 이것을 저자는 “바꾸어 읽기”라고 부른다. 2장 「총력전과 민주주의」는 천황제를 옹호했던 전시의 언어를 “바꾸어 읽어서” 전후 정치의 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했던 마루야마 마사오와 전시의 총력전 체제가 효율성을 강조했던 논리를 “바꾸어 읽어서” 전후 경제의 “근대적 인간 유형”를 수립하고자 했던 오쓰카 히사오가 주인공이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이 두 사상가는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습득한 언설을 완전히 버리고 새것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다. 3장 「충성과 반역」은 패전 직후에 급변했던 천황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과 히로히토 퇴위론의 흐름을 다루었다.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했던 병사 출신 국민들의 천황에 대한 반감도 볼 수 있다. 또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스승이자,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정치 철학자, 정치가였던 난바라 시게루를 중심으로 제기된 퇴위론이 전시의 내셔널리즘과 맞닿은 지점도 세밀하게 서술했다. 이들이 제기한 천황의 전쟁 책임은 어디까지나 천황의 명령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일본인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때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도 자국의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아시아 국가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4장 「헌법 애국주의」는 전쟁 포기와 비무장주의의 조항, 헌법 제9조에 대한 논의를 다루었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