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장-피에르 보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그는 성물 거래, 구마술, 청빈 논쟁, 바디 빌딩, 자동차 보험 등등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면서, 해박한 지식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몸의 귀환’과 ‘사회’의 탄생 과정을 서술한다.(…)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하지 않은 책, 기발하고 엉뚱하며 심오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현경, ‘역자의 말’ 중 “법과 예술, SF와 문헌학, 상상력과 통찰력을 얼키설키 엮고 종횡무진 펼치며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눈밝은 독자는 이 책을 때로는 추리소설로, 때로는 역사책으로, 때로는 풍자적 논평으로, 그렇게 다양한 결과 겹으로 읽어낼 것이다.” -심보선, ‘’추천의 글’ 중 법은 왜 잘린 손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1992년 프랑스. 한 남자가 목공일을 하다가 실수로 자신의 한쪽 손을 톱으로 자른다. 놀란 남자는 기절하고, 그 틈을 타 남자의 원수가 잘린 채 나뒹굴던 손을 소각로에 넣어 버린다. 깨어난 남자는 손을 찾지만, 손은 이미 한 줌 재만 남긴 채 타버린 지 오래다. 남자는 당연히 접합 수술을 받지 못하고, 손 하나가 없는 채로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분노한 남자는 원수에게 장애를 유발한 책임을 묻고자 한다. 원수에게 어떤 죄목이 적용될 수 있을까? 남자가 잘린 손을 접합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에 중상해죄일까? 혹은 남자의 것인 잘린 손을 훔쳐 무단으로 처분한 셈이므로 절도죄일까? 정답은, 놀랍게도, 무죄다. 당시 프랑스 법에 따르면 “몸이 곧 인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몸은 물건이 아닌 인격이고, 인격은 존엄한 만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린 손은 몸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물건으로 전락하고, 법적으로 주인 없는 물건 즉 무주물(無主物)이 된다. 무주물은 처음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다. 그러므로 남자의 원수가 주운 손은 법적으로 원수 자신의 것이 되었고, 그 손을 소각로에 넣은 것도 지극히 합법적인 행동이다. 이 모든 혼란이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게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자. 터무니없다고? 물론이다. 바로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이다.(27~28) 인격을 발명한 법, 몸을 추방한 역사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현실이었던 가상의 상황으로 『도둑맞은 손』은 시작한다. 실제로 1985년 프랑스에서는 자넬 다우드라는 수감자가 항의의 뜻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가 그것을 교도관에게 압수당해 반환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다. 미국에서는 존 무어라는 환자가 의사들을 상대로 자신의 희귀 세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이 소송은 수차례의 법적 공방 끝에 1990년, 존 무어에게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캘리포니아대법원 판결로 끝났다. 의사들과 생명공학 회사가 무어의 세포를 몰래 이용해 개발한 의약품과 그 권리, 그로 인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은 무어의 몫이 전혀 아니었다. 이런 법적 결정의 핵심 논리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책은 이런 아이러니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해박하고도 집요하게 탐구한다.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위하기 위한 법적 개념인 ‘인격’이다. 로마의 (노예가 아닌) 시민들의 지위와 의무, 재산에 대한 권리를 다루기 위해 ‘발명’된 이 개념은 의도적으로 몸-먹어대고, 싸고, 때론 더럽고, 성스럽기도 한 몸의 실체들-을 배제함으로써 법률가들이 지향하는 추상적이고도 완벽한 존엄을 뜻하게 되었다. 침해당할 수 없는 ‘인격’은 세속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심지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인 ‘물건’과 엄격히 구분됨으로써, 몸이 지닌 물건으로서의 속성을 포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개념으로는 현실사회의 복합적이고 예기치 않은 논쟁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분석이자 비판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존 무어는 자기 몸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존 무어는 (살아있는) 몸에서 채취된 세포들은 재화가 되어 시장 가격을 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착복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의 이름으로, 이 세포들에 대해 특허를 등록하고, 그것을 사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328)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 법 안에서는 저자는 법의 “탈육체화”가 낳은 가장 “가혹한 결과” 중 하나로, 인간이 ‘먹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법적으로 무시된다는 점을 꼽는다. 즉 “식량을 다른 획득 가능한 물건들과 동일한 범주로 분류하면서, 사람은 식량을 획득할 수도 있고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단식 투쟁을 비극적인 결말로까지 몰고 갈 자유가 있다.” 이 논리를 밀고 나가보면, “걸인이 굶어죽는 것은 민법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적법한 일”이 된다. 이런 법이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식량을 획득할 자유와 권리가 보석이나 사치품을 획득할 자유와 권리와 동등한 것이다. 평등한 인격을 지닌 것과 무관하게 불평등한 몸들의 현실 역시 가려져 있다. 가난하고 굶주린 몸이 있고, 부유하고 배부른 몸이 있다. 건강한 몸이 있고, 장애가 있는 몸이 있다.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이 있지만 법적 무대에 오른, 허깨비 같은 ‘인격’들을 다루는 법률가의 눈에는 그 차이와 처지가 보이지 않는다.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몸은 ‘물건’이 아니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로부터 도달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소유할 수 없다는 논리는 그러나 몸의 처분과 거래를 통제하기는커녕 그런 현실을 법의 사각지대로 만드는 아이러니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저자는 18세기 교회법을 예로 들며 “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당시 교회법은 “인간은 자기 생명의 주인이 아니며, 신의 처분에 달린 생명을 맡아서 사용할 뿐”이라면서 “자유를 지닌 인간은 자의대로 그것을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원한다면 자유를 팔고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관료화와 자본화 속에서 생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런, 인격과 몸에 대한 사유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프랑스에서 생명윤리법이 제정된 1994년 직전에,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려는 목적으로 출간됐다. 저자는 산업화와 생명공학의 폭발적 발전, 공공 보건 개념과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몸을 대상화하는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강력한 작동 하에 몸과 관련된 쟁점들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는 현대의 지형을 촘촘히 그려나가며 결국 생명의 현현(顯現)이자 주체인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고 해석하는 이 ‘사회’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낙태, 인공수정, 장기이식, 배아줄기세포 연구 등 생명윤리의 현안이 아닌, 보다 더 근본적인 영역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당장의 딜레마를 풀기 이전에, 그것을 푸는 기본 도구가 될 법제도, 나아가 사회 공통의 상식과 기준을 유효하게 재정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으로 저자는 인간에게 자기 몸의 소유권을 주자는 해법을, 도발적으로 제안한다.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몸을 ‘물건’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속되게 하자거나 처분 및 거래를 허용하자는 뜻이 전혀 아니며 법의 사각지대에서 사실상 온갖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몸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