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확고부동과 불확실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나와 세상 이야기 봉태규를 만난 것은 지난 해 초여름이었다. 볕은 따뜻했지만 덥지 않은 어느 날 성북동의 넓은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봉태규가 뚜벅뚜벅 걸어와 시야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거대한 스크린을 깨고 나온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고, 힘든 일이 겹칠 때 무작정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졌단다. 서점에 가서 에세이들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고 쓰기를 시작했다. 글 쓰는 것을 평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원고지를 채워나갈 때 확신은 위험한 것일 경우가 많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쓰고 스스로 만족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기우였다. 처음 그의 글을 읽을 때 그의 글이 마음속에 가득 차고 넘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쓰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소소하지만 감동적인 문장들. 이 책에서 봉태규는 군중 속의 고독,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만이 볼 수 있는 풍경, 느낄 수 있는 감성. 작고 사소하지만 넘겨볼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 소재들을 표현하는 문장은 특별할 것 없고, 변변치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봉태규라는 함수를 거쳐 나오면 또렷할 뿐 아니라 제법 그럴 듯하며, 사무치게 공감된다. 벌거벗은 남자들, 눈썹이 짙은 강아지, 한그루의 나무, 극장의 의자 따위와 그는 마치 이야기 하듯 살아있는 영묘한 존재로 둔갑시킨다. 그 속에는 자신의 메마른 갈증이 함께 담겨 있어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세상은 혼잣말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별적 자아 모든 자아는 개별적이어서 ‘개별적 자아’라는 이 책의 제목이 말장난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모든 자아가 개별적이라는 말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는 개별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간난아이가 유아기를 건너 자라면서 받는 교육부터 획일적이다. 그래서 취향, 삶의 모델도 서로서로 닮아간다. 아이들은 그런 획일적인 행로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심지어 경쟁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아의 개별성을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이 개별성의 상실 시대에 ‘개별적 자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봉태규는 이 책에서 상실된 자아와 대화한다. 그것은 어떤 기술 같은 것이다. 생경하지만 그런 풍경이 이 책의 백미다. 인생은 돌고 돌지만 결국 혼자인 것. 어째서 비극은 시작되고, 슬픔은 포개져 배가되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에 맞춰 구성하지 않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죽음, 결혼, 스스로가 아버지가 된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삶에서 겪는 고통들은 머지않아 기쁨과 치환되어가고, 타인의 삶과 내가 교차하기도 하며, 나라는 존재 없이는 세계가 규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태어나서 하나로 뭉쳐진 집단 속에 일부라고 느끼지만 결국 개별적인 존재로만 남는다. 우리들 삶은 개별과 획일을 오가지만 끝내는 혼자임을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