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삼국지

최진열 · War/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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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서장: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를 넘어서 1장 삼국지의 무대 2장 후한 붕괴의 정치사 3장 동탁, 천하를 찢어놓다 4장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다 5장 최강 군벌의 혈투: 원소와 공손찬 6장 황하 이남 군웅의 혼전 7장 조조, 헌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8장 하북의 원소와 하남의 조조, 자웅을 가리다 9장 손책과 손권, 강동을 지배하다 10장 적벽대전과 유비의 기사회생 11장 대기만성 유비, 드디어 인생 역전 12장 관우와 함께 퇴장한 영웅들 13장 조조의 죽음과 위나라의 건국 14장 실리보다 의리를 택한 유비의 비참한 최후 15장 삼국시대 정치 16장 삼국시대 경제와 지리 17장 삼국시대 전쟁사 1: 제갈량의 북벌 18장 삼국시대 전쟁사 2: 중원 왕조의 파촉·강남 정복 19장 서진의 통일과 자멸 참고 문헌 찾아보기

Description

지도와 사서로 읽는 삼국 전쟁사 위진남북조시대 국내 최고 권위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최진열 박사의 10년 노작!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와 진수의 정사『삼국지』를 넘어 가장 완전한 삼국지 국내 역사학자가 쓴 본격 삼국지 역사서이자 지도와 사서(史書)로 읽는 삼국 전쟁사. 군웅할거에서 삼국정립, 서진의 통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답한 영웅들의 모든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 최진열 박사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관련 국내 최고 권위자로 오랜 세월 삼국지 시대의 역사에 관해 연구했다. 저자는 진수의 정사『삼국지』뿐만 아니라, 『후한서』, 『자치통감』, 『진서』 등 그 시대를 다루는 거의 모든 사료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가장 객관적인 시각에서 통사 삼국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이 책 『역사 삼국지』는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지리와 지형, 인구와 경제, 군사 및 행정 제도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삼국지의 극적 장면들을 구성하는 주요 전투와 군웅의 전략을 약 200개의 지도로 상세히 밝혔다. 국내에 출간된 삼국지 관련 도서 중 학문적 권위와 지식의 깊이, 인물과 역사 비평의 측면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책이며,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집대성한 삼국지 역사의 최고 걸작이다.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 후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군웅이 할거하고, 위, 촉, 오 삼국이 정립하며 쟁투하는 스토리를 담은 ‘삼국지’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전투 장면과 극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흥분과 감동을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각기 다양한 특질을 지닌 영웅들의 모험과 전략을 평가하며 그 속에서 인생사와 경영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삼국지가 배경으로 하는 역사는 약 100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음미되는 동아시아 문화의 풍요로운 보고(寶庫)와도 같다. 한편으로 삼국지는 숱한 역사가들과 작가, 대중이 “현재의 관점과 지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재단하고 평가한” 대표적인 예다. 그런 점에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주요한 비교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정사를 기준으로 소설의 어떤 부분들이 허구인지 또는 작가의 천재적 상상력이 가미되었는지를 판별해왔다. 그렇다면 정사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책일까? 답은 ‘아니오’이다. 진수의 『삼국지』 역시 객관적인 태도로 역사를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수의 『삼국지』- 찬탈자들의 정치학 교본 진수(233~297년)는 본래 촉나라 사람이었지만 본격적인 관직 생활은 삼국을 최종적으로 통일한 진나라에서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위나라와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에 우호적으로 역사를 썼다. 진수는 위나라 또는 조조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유리한 사실은 부각하고 불리한 사실은 축소하거나 누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했고, 때때로 사실 자체를 왜곡하기도 했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적벽대전을 진수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삼국지』에서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후한 말 군웅할거시대 이야기는 차라리 『후한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고 자료도 풍부하다. 오히려 『삼국지』는 역사를 이용하여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문제를 잘 해결한 책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주로 ‘선양(禪讓)’이라는 방식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선양은 황제의 자리를 자발적으로 물려준다는 의미지만 사실상 권력 찬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조의 아들 조비는 후한의 헌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을 위협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 『삼국지』는 신생 왕조 개창자들이 찬탈의 오명을 피하고 개창의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게 도와준 여러 장치를 마련해준 책이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새 왕조의 창업자, 즉 찬탈자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의 비리와 부정을 누락하거나 달리 기록하는 서사를 완성도 있게 선보였다. 후한과 위나라, 위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왕조 교체, 즉 찬탈의 역사를 긍정하는 진수의 교묘한 필법은 그러한 역사를 ‘정상 역사’의 범주로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삼국지』는 위진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찬탈자들이 애용하는 유력한 지침서가 되었다. 조조 - 역경을 헤쳐나간 뛰어난 지휘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은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조는 숱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8할의 승률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그에 걸맞게 『삼국지』에서 그는 대체로 승승장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 때문인지 많은 독자들은 조조를 완성형 영웅으로 이해하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특히 조조가 독자적인 군벌로서 첫발을 내딛었던 연주 지배 시기에 말이다. 그는 황건적과 흑산적, 공손찬, 원술 등과 싸워야 했고, 여포에게 본거지를 빼앗기는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냉혹하고 무자비한 방식을 마다하지 않았고, 성장통을 잘 이겨냈다. 조조는 가장 일찍부터 치열하게 역경을 헤쳐나간 군웅 가운데 하나였고, 차근차근 경쟁자들을 탈락시키며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조조는 군사적 재능의 측면에서 대단히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전투에서 조조의 승률은 8할이었다. 삼국지의 군웅 가운데 누가 가장 전장에서 강했을까? 승률로 따져보면 1위가 손견, 2위가 손책으로 이 호랑이 같은 아버지와 아들은 9할의 승률을 자랑한다. 3위가 바로 조조였다. 특히 조조는 유비에게 가장 많은 패배를 안겨줬다. 조조는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마다 수도에서의 행정은 순욱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개 전장을 지휘했다. 그는 전쟁터에 부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휘하는 스타일이었다. 스스로 지략이 뛰어나고 훌륭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한고조 유방처럼 여러 장군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장군과 참모들의 의견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고, 그들이 제시하는 전략을 신중하게 따랐으며, 여러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았다. 이러한 조조의 능력은 천하통일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되었다. 조조의 전략적 관점 - 방어보다 공격 조조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의 원소, 동쪽의 도겸, 남쪽의 원술, 서쪽의 여포 등 언제라도 적이 침공해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의 전략적 관점은 수도를 소극적으로 방어하기보다는 주변 지역을 공격적으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허(허창)로 천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수도 허의 주변은 높은 산지가 없고 평지가 많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다. 조조가 주목한 것은 경제력이었다. 그는 천도를 단행한 196년에 둔전제를 실시했는데, 양민들을 모집해 그들로 하여금 허 일대에서 둔전을 경작하게 했다. 둔전은 원래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이 현지에서 농사를 지어 직접 군량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변경이 아니라 수도 인근에서, 병사들이 아니라 백성들이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수리 시설을 확충해 토지를 관개했고 그 결과 곡식 100만 석을 얻었다. 또한 운하망을 구축하여 군량 수송을 용이하게 했다. 훗날 촉나라를 정복한 위나라의 장군 등애는 당시 조조가 둔전을 실시하여 곡식을 저축한 덕분에 이를 토대로 사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즉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기존의 경제력에 추가적인 군량 생산을 가능케 하고 군량 수송 부담을 줄임으로써 화북을 통일하기 위한 물질적인 토대를 갖추었던 것이다. 조조는 어떻게 화북을 통일했는가? - 선택과 집중 조조가 화북을 통일한 결정적인 계기는 원소와 대결한 관도 전투(200년)였다. 사료의 호구수를 분석해볼 때 원소는 최대 1,200만 명, 조조는 7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실제 조조가 지배한 지역의 인구는 훨씬 적었다. 초창기 조조가 통치한 사예와 연주 일대는 전란으로 인구 유출이 극심한 지역했기 때문이다.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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