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 정교한 정치공학, 대중독재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라는 새로운 개념을 주장하는 노작《대중독재―강제와 동의 사이에서》가 책세상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물론 스페인의 프랑코이즘,
동독과 폴란드의 현실 사회주의, 비시 프랑스, 박정희 지배 체제와 일본의 총력전 체제 등 독재 체제를 연구한 국내외 학자 19명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독재와 민주주의, 좌파 독재와 우파 독재를 불문하고 모든 권력 체제의 성공 여부는 구성원들이 해당 체제의 정통성을 얼마나 인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체제의 정통성을 마련하는 가장 정교한 정치공학이 바로
대중의 합의와 동의――그것이 자발적이건 강제된 또는 조작된 동의이건――이다. 권력을 독점한 사악한 소수가 폭력과 강제를 행사해 다수의 무고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했다는 흑백 논리나 폭력과 억압을 통한 강압적
지배라는 단색적 이미지로 포착하기에는 근대 독재의 현실은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이에《대중독재―강제와 동의 사이에서》는 강제와 동의라는 기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대중독재의 지형도를 올바르게 그려냄으로써 '독재'라
는 개념에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고 자발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정교한 헤게모니적 장치들이 내장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대중독재 체제를 살아내야만 했던 동시대인들을'집합적 유죄'라는 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 그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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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래로부터의 독재
대중독재는 대중으로부터 독재를 용인, 동의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 대중을 수동적 구경꾼에서 적극적 참가자로 변화시킴으로서 형성되는 결과이다. 대중독재, 즉 아래로부터의 독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회 보장 정책이나 대규모 공공 사업을 통한 실업의 축소, 실질 임금의 증대 등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적인 진전이라는 물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살펴볼 때, 1929~1934년 이탈리아인들이
경제적 안정성 때문에 파시즘을 지지했으며, 일자리를 제공하고 가난을 퇴치하겠다는 나치의 약속이 가난한 농민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지녔다. 나치 시기를 실업 감소와 경기 호황, 질서로 상징되는'정상적 시기'로 이해하는
독일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숙청으로 인한 사회적 이동의 증대와 공공 영역에서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낸 스탈린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사'로 동원되어 고도 성장이 제공한 일자리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남한의 노동자들이 박정희의 개발 독재에 보낸 지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인격을 인정한다는 슬로건 아래 노사 관계를
인간 관계로 환원시키고, 생계를 보장하는 '생활급 체계'를 정착시킨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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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중독재의 정치종교적 성격
그러나 체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단순히 경제적 요인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중독재 체제들은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강조하고, 19세기 자유주의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강조한다. 이것은 비단 나치즘과 파시즘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영광을 노동자들의 위신과 결부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을 사회 내로 포섭할 수 있었던 서유럽의 사회 제국주의, 산업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온건하면서 일에 대한 높은 수준의 헌신과 열의를 지닌 산업 전사로 만들어 조국 근대화의 프로젝트에 끌어들인 박정희 체제의 흡인력, 스탈린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기획에 대한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호응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중독재 체제에 대한 동시대인들이 절실하게 체감한 것은 폭력과 억압이 아니라 국가, 민족, 인종, 프롤레타리아의 신성화, 상징과 집단적 의례의 체계적 사용, 집단에 대한 광신적 헌신과 적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 대중의 열광과 갈채, 지도자 숭배와 같은 정치종교적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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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중독재》의 지향점
대중독재에 대한 집합적 기억이 빚어내는 정치적 복합성은 이분법적 도덕주의로는 포착할 수 없다. 반인간적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소수의 권력 핵심을 실정법으로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나머지 대다수에게 역사적 면죄부를 발부하는 식으로 작동해서는 곤란하다. 사실상 대중독재의 과거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문제는 사법적 차원에서의 죄의 유무를 추궁하는 문제를 넘어서, 그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죄의식과 수치심을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역사적 진실의 정치성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다.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
살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다.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 대 다수의 선량한 희생자라는 이분법을 고집하는 민중적 도덕주의가 결국에는 '반도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희생자
의식의 자기 연민에 빠져 독재의 과거에 대한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회적 기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대중독재―강제와 동의 사이에서》가 지향하는 것은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반사하는
역사적 거울로서 작동하고자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