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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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_ 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중에서 나희덕 시인이 5년 만에 펴낸 산문집 45편의 산문을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엮다 산책은 가만히 있는 풍경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걷기를 통해 우리는 내면의 사색에 빠져든다. 따라서 산책은 동적인 행위인 동시에 내면에 몰입하는 정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의외로 우리는 이 ‘가벼운 산책’에서 많은 것들을 발견한다. 비장함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무언가 채워지고, 누군가와 나누지 않으니 풍경은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 된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산책은 취미이자 일상이 되어왔다.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깊이 있는 시들을 써온 나희덕 시인 역시 매일같이 산책을 즐기는 ‘산책자’이다. 이 책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나희덕 시인이 국내외 산책길에서 만난 45편의 산문을 사진과 함께 담았다.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에 이어 5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산문집이다. 세계에 깃든 신비를 언어로 해독하는 시인의 시선을 통해 만난 서정적인 풍경들 이 책에 등장하는 산문들은 일상적인 풍경을 담아냈음에도 시인의 시선을 통해 갯벌에서 발견한 진주처럼 가만히 빛난다. 그저 스쳐지나갈 수 있는 장면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것, 세계에 깃든 신비로운 것들을 언어로 해독해나가는 것,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라면 시인은 산책하는 시간에도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과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노파의 뒷모습 그리고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에서는 인간의 연약한 등을 보고, 개와 함께 노숙하는 이와 펠트지로 된 비둘기를 전시하는 ‘비둘기엄마’를 통해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온기를 발견한다. 또 카프카·고흐·안네 등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서기도 하고 소록도에서 뭉툭한 손을 가진 노인과 여름밤 바닷가에서 백사장에서 무언가를 찾는 탐지자를 만나기도 한다.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과 사람 그리고 사물들은 모두 제각각의 색깔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무심코 스쳐지나갈 수 있는 장면들이 시인의 시선에 하나하나 담긴다. 가까이에 있지만 놓치기 쉬운 장면들과 보고 있으나 보고 있지 않았던 것들이 시인의 시선에 의해 반사되어 모서리를 드러내는 순간. 시인의 마음에 통해 시적 언어로 재해석된 장면들은 커다란 묘사나 과장 없이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은 잃어버렸어도 어떤 물건이 백 년을 넘겼다면 거기엔 영혼 같은 게 깃들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신비를 해독해나가야 할 의무가 시인인 나에게는 있다고. 언젠가 이 알 수 없는 시계에 대해 한 편의 시를 쓰게 될 거라고.”(52쪽),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만져본 지도, 나무를 꼭 끌어안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87쪽) 같은 부분에서는 산문의 곳곳에 깃든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다짐들이 단단하게 전해진다. 한 편의 시로 열리는 산문집, 한 걸음씩 걷는 시인의 산책에 동행하다 이번 산문집의 제목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나희덕 시인의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의 마지막 행을 변형한 것이다. 책의 서문을 대신하여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을 ‘여는 시’로 수록한 것은 저자와 책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의 간격을 좁히고자 시인이 내미는 손길이다. 책 속에 담긴 45편의 산문들은 주로 도착하려는 지점보다는 한 걸음씩 걸어가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늘 주위를 살피는 일을 놓치지 않는 시인의 세심함과 여러 사유들을 통해 독자들은 하여금 시인이 닿고자 하는 지점 또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표지를 비롯하여 책에 수록된 사진은 모두 나희덕 시인이 여행지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 이는 글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기능을 하면서, 따로 떨어져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글과 밀착되어 있다. 특히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시인이 아일랜드의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노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함께 배치된 사진은 직접 해변에서 그 노인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시인의 설명처럼 그 모습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까지 연상되는 확장성을 지닌다. 또한 <벽은 말한다>에서 시인을 놀라게 한 북경의 오래된 골목에서 본 벽은, 두 눈을 부릅뜬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진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어떤 느낌인지 상상만으로는 어려웠을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시인이 상상하는 ‘벽에 원숭이가 살고 있다면’의 이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시인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은 프레임 속 이미지들의 크기나 색감 등의 대비가 잘 느껴지며 따라서 시인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또한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들과 어우러진 사진은 ‘걷기’를 통한 산책을 넘어서 ‘사색’의 산책으로 독자를 이끈다. 따라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덧 시인의 산책에 동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시인이 걸었던 수많은 길에 그 옆에 잠시 멈춰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햇살 아래서 뛰노는 아이들을 향해 미소 짓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껏 세상이 품은 풍경을 응시하다가 다시 그 너머를 향해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전혀 서두르지 않고 지나가는 풍경과 사람들을 세심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담아 나간다. 겨울 지나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의 결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나 싶어 눈을 떴더니 여러 색으로 피어나던 꽃들이 조금씩 다음 계절에 제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귀퉁이를 접어둔 책장 하나를 넘기듯 거리의 풍경은 어느덧 초록빛으로 변해간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아까운지 낮은 늑장을 부리며 어둠에게 거리를 내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봄날을 조금 더 오래 만끽하기 위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신발을 고쳐 신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고.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한다고. 당신도 이 산책을 통해 자기만의 길을 그리며, 그곳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