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 목소리로 그려낸 한국 현대 미술의 지형도
이 책은 15장으로 구성된 본론을 중심에 두고 이를 돕는 글 두 편이 앞뒤에 배치된다. 「글을 읽기에 앞서: 한국 현대 페미니즘 미술의 흐름」은, 페미니즘 미술 운동의 발아기인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 민중계 페미니즘, 1990년대 탈모더니즘 경향의 페미니즘 미술에 이어, 다문화주의와 글로벌리즘을 표방한 본격적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시대인 2000년대까지의 변화의 흐름을 살핀 뒤, 2010년대 이후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리부트’된 소위 ‘넷페미’ 현상을 짚어 본다. 「글을 마치며: 페미니즘 미술의 빗장을 푼 나혜석과 천경자」에서는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적 연속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여성 운동과 여성 화단의 근대기 ‘허스토리’를 소환, 재조명하고,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연 나혜석과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현황을 파악하고 성과를 가늠하며 앞으로의 전망을 헤아려 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인 만큼, 저자는 담론 들여다보기, 현장 내다보기를 두 축으로 페미니즘 화두와 작가 연구를 교차, 병치하는 방식을 취한다. 각 주제 아래 원로, 중진, 청년 작가들이 팀을 이루어 특출한 사고력과 색다른 감성, 창작의 희열과 고뇌를 보여준다. 저자의 이같은 매핑(mapping)과 분류 방식은, 남성중심의 미학적 지형 분류 방식이 아니라 “미술 작가들의 목소리와 그 결, 방법적 구현들로 분류한 것”(김혜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두와 작가의 조합마다 달라지는 분절적 배열이 각 장에 독립적인 의의를 부여하기 때문에, 순서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읽어도 무방하다.
여기 포함된 작가들은 ‘페밍아웃’한 페미니스트도 있고, 작업의 내용은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으나 페미니스트로 불리길 거부하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큐레토리얼, 비평적 판단을 중시하여, 본질론이나 해체론의 시각에서 다양한 주제를 쟁점화하는 작가들을 일차적 대상으로 선택했다. 여성 문제보다는 사회의식이나 역사 인식을 우선시하거나 페미니즘 계보의 바깥에서 작업하는 젠더중립적인 작가도 있는데, 이들은 페미니즘의 여러 목소리, 그 다양성과 확장성의 맥락에서 포함되었다.
페미니즘의 영원한 화두 — 섹슈얼리티, 몸, 광기·에로스·히스테리
저자 김홍희가 설정한 키워드들을 차례로 일별해 보면, 페미니즘에서 가장 기본으로 다루어지는 여성성과 몸으로 시작해, 성 정체성, 정치, 환경, 계급, 인종 등 억압과 소외를 야기하는 주제들로 발전해 간다. 이어서 미학, 알레고리, 매체의 측면에서 페미니즘 미술의 지평 넓히기를 시도하고, 끝으로 페미니즘의 컬렉티브 활동을 살펴본다.
첫번째 장 「여성성과 섹슈얼리티」의 작가는 윤석남(1939)과 장파(1981)로, 이들 작품은 여성성에 바탕을 둔 본질주의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지만, 주제의식이나 조형적 방법론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는 여성 특유의 관계지향적 감수성, 모성적 사랑과 여성의 힘을, 후자는 육체적 섹슈얼리티와 심리적 에로티시즘을 주목함으로써, 각각 1980년대 후기본질주의의 양대 축인 미국의 여성중심론과 프랑스 네오페미니즘을 상기시킨다. 성차를 거부하는 해체주의 페미니즘에 비해 뒤쳐진 시각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본질주의는, 그러나 대중에게 호소하는 힘과 실존적 생명력을 지니는 까닭에 계속 재등장하고 있다. 윤석남과 장파 역시 본질주의 한계 속에서 본질주의를 전략화하는 동종요법적 발상으로 페미니즘 정치학을 수행한다.
「몸의 미술」에는 괴물적 상상력과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신체미술과 후기신체미술의 양상을 보이는 세 작가, 이불(1964), 이피(1981), 이미래(1988)가 초대된다. 이불의 ‘몬스터’ 연작, 이피의 ‘검고 따뜻한 짐승 한 마리’, 이미래의 〈캐리어즈〉로 대변되는 괴물은 계급, 인종, 젠더, 연령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경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사이보그와 같은 존재로 현현한다. 이들의 작업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로테스크에 긍정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이 괴물 같은 생명력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광기, 에로스, 히스테리」에는 ‘미친년’의 정신분석학적 함의를 카메라 렌즈로 파헤치는 사진가 박영숙(1941), 에로티시즘을 ‘원초적 생명력’으로 파악해 해학적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다매체 예술가 이순종(1953), 대담한 페인팅으로 악동 소녀의 도발적 히스테리를 표출하는 이 시대의 앙팡 테리블 이은새(1987)가 등장한다. 이들은 해방의 탈출구를 찾는 심리적 반항아들로서, 여성을 타자로 간주하는 부계적 젠더 이념에 맞서 무의식적 통로로 분노를 폭발시킨다.
해체주의 페미니즘과 차별의 유형들 — 퀴어, 정치, 환경, 계급
‘퀴어’는 ‘이상하고 색다른’ 섹슈얼리티로 정상과 비정상의 규범을 탈피하고, 해체주의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인종, 장애, 난민 등 소수자를 옹호하는 정치적 기제로 작동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 세 명으로 구성된 「퀴어 정치학」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로 남성에 편향된 역사관에 도전하는 정은영(1974), 길거리나 무대 퍼포먼스로 역사의 피해자와 난민, 퀴어 등의 권익을 주장하는 흑표범(1980), 부계적 가족 제도와 생식 메커니즘의 기저를 흔드는 ‘넷페미’ 세대의 웹 미디어 아티스트 김나희(1991)를 소개한다. 이들의 작품은 성 정체성의 본질을 의심하며 젠더 규범을 추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저항적 여성서사」는 문명, 시대, 체제 비판의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측면에서 궤를 같이하는 네 작가, 임민욱(1968), 송상희(1970), 함양아(1968), 김아영(1979)을 매치시킨다. 이들은 근대화의 폐해, 전지구적 재앙,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비판적으로 대응한다. 연구 기반의 학구적 태도와 혼합 매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직역 대신 의역, 직유 대신 은유를 선호하는 우화적 방식에서, 무엇보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를 읽어내는 서사적 충동에서 서로 닮아 있다.
「에코페미니즘」으로 묶인 홍이현숙(1958), 조은지(1973), 홍영인(1972)은 자연과 여성을 타자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지배원리를 비판하는 생태주의 페미니스트들이다. 특히 이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은 생태학적 관점을 포함하고, 생태 문제는 페미니즘 관점에 기초해야 한다는 급진적 생태주의 페미니즘, 특히 동물권을 옹호하는 동물주의(animalism)와 노선을 같이한다.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의 근원이 환경뿐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진화 과정에 있다는 인식 아래,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과 더불어 사는 공존동생적 비전으로 페미니즘을 확장시킨다.
여성이 재현하는 여성의 초상은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대상이 젠더적으로 일치함으로써, ‘남성은 보는 주체, 여성은 보이는 대상’이라는 뿌리 깊은 시각 법칙을 무화한다. 「감정노동자의 초상」에 등장하는 작가 주황(1964), 신민(1985), 치명타(1988)는 각각 사진, 조각, 영상을 주매체로 작업하지만, 초상화라는 전통 장르를 현대화하고 오로지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한데 만난다. 이들의 초상은 작가라는 감정노동자에 의해 재현된 감정노동자들의 초상, 즉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새로운 유형의 페미니즘 초상으로서 미술사적, 비평적 의의를 갖는다.
경계인의 정체성 — 노마디즘과 디아스포라
「노마디즘」이라는 키워드 아래 동행하는 김수자(1957)와 함경아(1966)는 여행을 통해 현대 노마디즘의 윤리를 실천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김수자는 인류학적 관심으로 유목민적 여행을 수행하며, 함경아는 여행을 통해 예술적 발상을 일으키고 숙성시킨다. 이 두 작가의 노마디즘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성적 사유인 글로컬리즘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노마디즘의 물리적, 상징적 표상이며, 함경아의 북한 자수는 변방의 기예가 문화적, 지리적으로 재조명되는 이동의 메타포로 의미가 확장된다. 치유자, 매개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함축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