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영화사

이효인 and 2 others
368p
Where to buy
content
Rate
3.2
Average Rating
(3)
Comment
More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근대사회로 빠르게 이행해갔다. 이 시기 유입되어 조선 문화의 획기적 변화를 주도한 문물 가운데 하나가 활동사진이다. <한국근대영화사>는 활동사진이 유입되고 1892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인부좌(仁富座)가 설립된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장면과 사건, 인물, 영화운동, 영화이론, 작품, 관련 기록을 포괄적.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영화가 유입되면서 극장이 설립되고, 영화 제작 산업과 흥행업이 발달하였으며, 영화라는 근대적 대중문화가 조선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신생(新生) 조선의 ‘영화인’과 조선의 ‘관객’은 일본의 자본과 일본 영화산업의 지배하에 자기 땅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조선영화’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으로 생존 그 자체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양한 영화적 시도와 개인적 역량이 꽃을 피웠으며 영화판은 변화와 각축, 새로움과 열정의 문화 장(場)으로 뜨거운 한 시대를 앓는다.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겪은 왕조의 몰락과 식민기의 암울, 전쟁의 시련과 이념의 혼돈이 고스란히 이 시기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렇듯 혼돈 속에서 급속도로 전개된 폭풍우 속 급류 같았던 당대 영화계의 역동적인 흐름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왓챠

"우리가 사랑한 마법의 공간"

35주년 기념 재개봉, 극장에서 다시 만나요

왓챠

Author/Translator

Table of Contents

책을 내면서 1부 1892-1925 영화 유입과 영화산업의 형성 (한상언) 1 영화 유입과 극장 설립 - 극장과 흥행업의 탄생 - 활동사진 유입 - 언어와 문화 차로 이원화된 서울의 극장 2 영화산업의 형성 - 활동사진 상설관 등장 - 닛다 연예부와 하야카와 연예부 - 우미관과 단성사 - 활동사진시대의 꽃, 변사 3 연쇄극과 영화 제작의 시작 - 연쇄극 유입과 제작 - 일본인 상설관의 극영화 제작 - 조선총독부의 영화 활동 - 경성일보사의 영화 제작 4 극영화의 시대 - 극동영화구락부의 〈국경〉 - 동아문화협회와 단성사 촬영부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백남프로덕션과 계림영화협회 - 영화 검열 2부 1925-1935 영화, 영화인, 영화운동 (이효인) 1 1920년대 중반, 조선영화 장場의 각축 - 근대영화의 출발, 유랑하는 이경손 ? 변사 감독 김영환 - 근대영화사의 절반, 나운규 -〈아리랑〉, 통속성과 외래성 그리고 민족성 - 심훈과 ‘먼동이 틀 때’ - 대중문화 시장의 각축, 라디오 매체의 등장과 경성방송국 - 영화를 찬양하는 모임, 찬영회 2 조선영화의 새로운 시도 - 조선영화예술협회 -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결성과 해체 - 근대영화의 시도, 카프KAPF영화 - 주인규 그룹과 적색노조영화 - 카프 검거사건 3 1930년대 초반, 조선영화 장場의 변화 - 근대영화의 대중성, 최독견 ? 윤봉춘 ? 이규환 ? 안종화 - 경향영화에서 대중영화로 3부 1935-1945 발성영화시기에서 전시체제까지 (정종화) 1 발성영화라는 모색 - 토키의 시도(들) - 경성촬영소의 협업協業 시스템 - 조선 영화인의 분투, 한양영화사 - 일본영화 촬영소 유학파 - 무성에서 발성까지, 조선영화의 스타일 2 조선영화 제작 지형의 변화 - ‘영화 통제’라는 역설적 기회 - 조선 영화계의 활기, ‘조영’과 ‘고영’ -〈나그네/다비지〉 그리고 일본영화와의 합작 경향 - 조선영화의 이출移出과 ‘내지’ 일본의 수용 3 조선영화의 전시체제 - 조선영화령과 영화신체제 - 1940년대 초반 경성 흥행계 - 조선영화와 내선일체內鮮一體 - 문화영화 : ‘조선문화영화협회’와 ‘조선영화계발협회’ - 최인규의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가 말해주는 것들 4 국책영화라는 장場 - 조선영화의 마지막 모색 - ‘조선영화’라는 특수성 - 식민지 영화 국책의 산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 임화의 ‘조선영화론’ * 미주 * 참고문헌 * 찾아보기

Description

짧지만 뜨거웠던 시대의 영상, 최초의 한국근대영화 연대기 조선인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을 담다! ∎ 탄생부터 존립까지, 근대 한국영화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근대사회로 빠르게 이행해갔다. 이 시기 유입되어 조선 문화의 획기적 변화를 주도한 문물 가운데 하나가 활동사진이다.『한국근대영화사』는 활동사진이 유입되고 1892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인부좌(仁富座)가 설립된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장면과 사건, 인물, 영화운동, 영화이론, 작품, 관련 기록을 포괄적 ․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영화가 유입되면서 극장이 설립되고, 영화 제작 산업과 흥행업이 발달하였으며, 영화라는 근대적 대중문화가 조선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신생(新生) 조선의 ‘영화인’과 조선의 ‘관객’은 일본의 자본과 일본 영화산업의 지배하에 자기 땅에서 타자로 위치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과 ‘조선영화’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으로 생존 그 자체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양한 영화적 시도와 개인적 역량이 꽃을 피웠으며 영화판은 변화와 각축, 새로움과 열정의 문화 장(場)으로 뜨거운 한 시대를 앓는다. 불과 5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겪은 왕조의 몰락과 식민기의 암울, 전쟁의 시련과 이념의 혼돈이 고스란히 이 시기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이렇듯 혼돈 속에서 급속도로 전개된 폭풍우 속 급류 같았던 당대 영화계의 역동적인 흐름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굳건한 토대가 된 것이다. ∎ 2019년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근대영화’를 새롭게 명명하다 조선영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근대 사이, 그리고 서구영화와 일본영화 사이에서 만들어진 식민지 근대의 산물이자 기록이다. 일제와 일본 영화산업과 타협하고 경합하며 만들어낸 조선영화의 미장센 속에 조선 근대의 풍경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근대영화’라는 용어와 그 개념을 최초로 공식화했다. 기술적으로는 유럽에서 발명되었고,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재탄생한 영화는 전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와 경제 시스템 속에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비록 조선영화의 근대는 식민지 상황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속에서 일궈낸 조선인, 조선영화라는 독보적인 자의식은 그 시대가 남긴 영화와 그들의 영화적 행보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저자들이 일제 강점 시기의 조선영화를 ‘한국근대영화’라고 명명한 이유는 바로, 조선영화가 조선인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상영되었다. 1963년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이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아 이날을 ‘영화의 날’로 지정하였고,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 책 『한국근대영화사』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한국영화의 다양한 근대성 논의를 세 명의 저자가 하나로 엮어낸 15년 연구의 결실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는 9편의 조선영화 필름이 차례로 발굴되었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2014년까지 일본 잡지와 매체 속에 남은 조선영화 기록을 집대성했다. 해당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에 대한 총체적 고찰이 근대영화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고 영화사의 누락된 부분을 채우며 책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간 출간된 통사 형식의 한국영화사에서 다루었던 근대기 영화에 관한 주요 쟁점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롭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쟁점과 논의를 재분석했다. 한국근대영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 주제들을 엄밀한 비교 분석, 확장된 한일 관계사 연구 등을 통해 보다 치밀하게 기술한, ‘한국근대영화사’의 첫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상영장의 진풍경, 영화에 열광했던 조선인 관객들 얼마 전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20세기 초 경성. 이 시기 조선 지도를 보면 서대문에서 종로통을 중심으로 원각사, 우미관, 단성사, 광무대 등 조선인을 위한 극장이 있었고, 남대문과 충무로, 남산을 잇는 본정길에는 일본인 전용 극장이 늘어서 있어 극장은 두 민족의 정신적 거리만큼이나 지역적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1903년 『황성신문』에는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동화 10전을 받고 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실렸는데, 새롭고 진기한 볼거리였을 ‘움직이는 사진’을 보러 전기회사 기계창고 공간에 모여든 조선인들의 호기심에 찬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극장이 세워지던 전후 시기의 영화 상영 모습을 전해주는 진풍경이다.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 제작되기 전, 조선에서는 이미 서구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어가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절 관객들은 동작에 맞춰 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진기했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지껄임’에 이내 피로감을 느꼈고, 〈춘향전〉의 상영으로 조선 사람의 말이 스크린에서 들리자 이에 열광했다. 토키 〈춘향전〉을 보기 위해 극장은 매일 매야 초만원을 이뤘고 이 영화의 성공은 토키 제작 열기에 불을 붙였다. 1940년대 전시체제하에서도 계발과 선전을 목적으로 한 지방 순회상영회는 계속되었는데, 이와 관련된 조선총독부 직원의 다음 기록에서 영화 속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든 조선 관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동영사반이 멀리 떨어진 벽지의 촌락을 방문하면 2리 3리나 떨어진 부락에서부터 조선의 많은 아녀자들이 아기를 업고 도시락을 지참하여 도보로 오는데, 추운 겨울에도 화기가 적은 (상영)회장에서 마지막까지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열심히 보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또 도보로 수 리 길을 돌아가는데, 이런 장면을 보면 ‘역시 영화밖에 없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된다.”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조선영화’의 풍경을 엿보다 영화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자본주의적 성격과 오락성이 핵심인 예술이지만 당시에는 계몽과 교화를 위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조선에서 제작된 최초의 위생 계몽영화 〈생의 과〉(生の誇, 1922)는 위생관념이 부족하여 전염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미모가 망가져 괴로워하다 연인과 함께 자살한다는 내용으로, 극적 줄거리를 통해 대중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의 검열과 제약으로 상영이 취소된 영화도 있다. 최초의 극영화인 〈국경〉(1923)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 영화로, 일본 국경수비대가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이었다. 이 마적단이 만주에서 활약하던 우리 무장독립군이었던 까닭에 개봉 첫날 조선인 학생들의 엄청난 비난과 야유를 받았고, 조선인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어린이들은 의무교육을 받던 시대, 수업료를 내지 못해 거리의 부랑아로 전락한 조선인 학생을 조선의 목사가 구제한다는 내용의 〈수업료〉(1940) 역시, 제국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 금지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에 의해 최초로 영화가 제작된 것이 1919년이라고 하고 그 이전에도 영화는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안타깝게도 필름으로 남겨진 가장 오래된 영화 자료는 1934에 제작된 〈청춘의 십자로〉다. 이 영화를 통하여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과 당시의 영화 문법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근대의 풍경을 그 시대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영화 속에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 유한층이 누리는 각종 생활용품들, 그리고 기차와 자동차의 질주, 골프 치는 모습 등이 그려졌

Collections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