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예술’의 시작
앙토냉 아르토가 꿈꿨던 ‘미래의 연극’과 이사도라 덩컨이 갈망한 ‘미래의 무용’을 발판 삼아 출발하는 이 책은, 미래를 향한 아르토나 덩컨의 분홍빛 비전과는 다른 길에 선다. ‘미래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니, ‘미래 예술’이란 무엇이 아닌가?
“이 책은 여러 구체적인 작품을 횡단하지만, 일련의 정해진 잣대로 작품을 평가하는 평론서도 아니고, 중요시되는 동시대 작품들을 유형화하는 아카이브도 아니다. ‘훌륭함’의 기준을 제안하는 이론서는 더더욱 아니다. 특정한 작품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문제에 집중할 뿐, 그 작품의 총체적인 의미를 규명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해독하지 않는다.
이 책은 최근의 뜨거운 화두나 유행하는 개념을 정립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다원 예술, 통섭, 융복합, 탈경계, 탈매체, 다큐멘터리 연극, 장소 특정 연극, 포스트 드라마 연극, 농당스, 관계 미학, 수행적 퍼포먼스 등 오늘날 공연장과 미술관 안팎을 떠도는 적지 않은 개념들이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작품과 이미 인연을 맺고 있겠지만, 이 책의 목적은 구체적인 사조나 양식, 혹은 흐름을 ±‘정하거나 조망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개념적 굴레에 맞춰 작품들을 범주화하지도 않는다.
이 책에 목적이 있다면, 작품을 통해 오늘날 예술이 야기하는 가능성들을 질문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탐색한다. 그 가능성들은 일련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발상을 넘어 특정한 현장에 발생하는 구체적인 질문들이다. 현실에 대한 질문들. ‘미래’는 그런 질문들을 위한 단초이자 도구다. 『미래 예술』은 ‘미래’로서 ‘예술’을 본다.”
- 「들어가며 - ‘미래’의 고고학」 중에서(본문 10~11쪽)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떠올릴 법한 ‘미래’를 새롭게 정의하며 책의 서두를 연다. 이들이 말하는 ‘미래’란,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예술이 계속해서 생성해내는 가능성들이 임박한 상태다. 이들이 말하는 ‘미래’란, 이러한 가능성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도래하지 않은 미완의 시점에서 오늘날의 예술을 바라보기. 그러므로, “미래는 늘 현재형”이다. “『미래 예술』은 ‘미래’에서 ‘예술’을 본다.”
‘미래’에서 ‘미래’로서 예술을 바라보기 위해, 『미래 예술』은 과거를 다시 바라본다. 과거의 이름은 ‘모더니즘’이다. 그간 회화의 순수성을 옹호하며 미술관에 침투하는 불순한 ‘연극성’을 경계해온 현대미술의 특징이었던 모더니즘이야말로 환영주의라는 19세기 전통에 함몰되어 한참 뒤처져 있었던 연극성에, 공연 예술에 필요한 정신이다. 이곳에서 모더니즘은 철저한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을 통해, 즉 “예술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기반으로 한 “미래의 근원”으로서, 공연 예술을 혁신하게 된다.
『미래 예술』은 이러한 질문들을 무대에, 현실에 던지며 시작한다. 질문이 던져진 곳에 피어날 가능성들을 바라보며.
‘미래 예술’의 지형도
『미래 예술』은 1990년대부터 2016년까지 국내외에서 열렸던 주요 공연 예술들을 세세히 다룬다. 그러므로 공연 예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동안 어떠한 공연들이 열려왔고 그 공연들이 어떤 면에서 주목을 받았는지 파악하는 데 이 책이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공연 평론이나 리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엮어 보여주지 않는다. 우선 ‘미래’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 후, 그 관점 아래 연극, 춤, 몸, 언어, 극장, 실재, 관객 등 공연 예술의 주요 개념들을 분석하고, 그 맥락 위에 주목할 만한 공연들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미래 예술』은 수년간 공연 예술을 기획하고 연구하고 직접 무대에 올려온 저자들이 그린 새로운 미래 예술의 지형도이다.
이 새로운 지형도에서 우리는 다음의 작품들을 만난다. 인간의 목소리로 발화된 음성언어 1천여 개를 재현하는 「말들의 백과사전-모음곡 2번」(조리스 라코스트, 2015).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시작되면서 천장에 장착된 분사기 마흔 개가 일흔네 마리 소의 뼛가루를 내뿜는 「봄의 제전」(로메오 카스텔루치, 2014). ‘반려 로봇’ 안드로이드가 죽음을 앞둔 인간 주인에게 시를 읽어주는 「사요나라」(히라타 오리자, 2010). 원형 무대 위, 하체는 고정된 상태에서 상체의 움직임 여섯 동작만으로 미세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독무 #2: 주파수」(브리스 르로, 2009). 유튜브로 부토를 익히면서 그 안무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즉 신체를 ‘상황의 산물’로 여기는 「또 다른 상황의 산물」(그자비에 르 루아, 2009). 가전제품들을 성적 파트너로 삼아 듀엣을 펼치는 「7가지 방법」(정금형, 2009). 경사진 1층 객석 뒤쪽에서 익명의 신체 20여 개가 굴러 내려와 관객을 습격하는 「1층석」(아니 비지에 - 프랑크 아페르테, 2009). 컴컴한 방, 벽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 그 위쪽 구멍에 박혀 있는 벌거벗은 남자의 상체로 당혹스러운 이미지를 구현한 「천국」(로메오 카스텔루치 / 소치에타스 라파엘로 산치오, 2008). 베를린의 ‘샘플’로서 무대에 선 100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움직이며 통계 분포를 그리는 「100% 베를린」(리미니 프로토콜, 2008). ‘정상인’의 체격을 갖추지 못한 남성의 신체로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하는 「조르주 망델가(街) 36번지」(라이문트 호게, 2007).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안무가가 임의로 관객을 지휘하는 「봄의 제전」(그자비에 르 루아, 2007). 아무런 안내 없이 두 구역에서 공연이 열리는 「헤테로토피아」(윌리엄 포사이스 / 포사이스 컴퍼니, 2006). 관객이 입장료를 지불하고 예약한 자리를 거대한 토끼 인형들이 점령하고 있는 「베를린」(로메오 카스텔루치 / 소치에타스 라파엘로 산치오, 2005). 작가 이름도, 작품 제목도 밝히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공연되었던 (그자비에 르 루아의) 「무제」(작자 미상, 2005). 6천 5백여 개의 하얀 풍선이 허공에 떠 있는 「흩어진 군중」(윌리엄 포사이스 / 포사이스 컴퍼니, 2002). 지난 한 세기 무용의 역사를 무용으로 기록하고자 모던 댄스 안무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무대에서 샘플링하는 「무제」(티노 시걸 - 보리스 샤르마츠, 2000)…. 온갖 공연들의 면면에서, 혹은 그 사이에서, 갖가지 말들이, 뒤따르는 질문들이 발생한다.
이중 특히 ‘농당스(non-danse)’를 대표하는 제롬 벨의 작품들은 우리가 그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지점들을 건드리며 생각을 전복시킨다. 그자비에 르 루아가 안무하고 출연했지만 그 발상이 제롬 벨에게서 비롯되었기에 제롬 벨의 작품이 된 「그자비에 르 루아」(제롬 벨, 2000). ‘제롬 벨’이 분명한 이가 나와 자신을 ‘앤드리 애거시’로 소개하는 등 퍼포머 네 명이 스스로를 거듭 거짓 호명하는 「마지막 퍼포먼스」(제롬 벨, 1998). 티셔츠 수십 벌을 껴입고 등장한 퍼포머가 티셔츠를 한 장씩 벗으며 거기 적힌 메시지를 드러낸 채 서 있는 「셔톨로지(셔츠학)」(제롬 벨, 1997). ‘토머스 에디슨’과 ‘스트라빈스키 이고르’는 등장하지만 정작 ‘제롬 벨’은 나오지 않는 「제롬 벨」(제롬 벨, 1995). 춤을 추지 않는(‘농당스’) 대신 안무가의 아파트에서 찾아낸 사물들을 가지고 노는 「저자에 의해 주어진 이름」(제롬 벨, 1994). 짜여진 동작을 넘어 춤을 추는 행위 자체, 춤을 추는 동기를 묻는 그의 작품들은 안무에 대해, 작품에 대해, 관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한 관객만이 존재할 뿐.” (본문 191쪽)
“관객을 능동적으로 만들려면 퍼포머가 수동적이어야 한다. 모두가 수동적으로 머물면 좋겠다. 최소한의 계약. ‘미래의 연극’이랄까. 극장 안에서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을 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는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