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중국에서 낯선 도시를 만났다
서로 다른 문명들이 뒤얽히고 어제와 오늘이 켜켜이 겹친
개항도시, 독창적으로 다시 읽고 걷는다
광주.하문.천주.영파.상해에 걸친 개항도시, 오늘의 중국에서 개항도시에는 현대문명이 가지는 제국-식민지성이 가장 농후하게 담겨있다. 서로 다른 국가와 언어, 인종과 종족 즉 서로 다른 문화 경계들이 교차하는 개항도시는 근대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폭력과 현대 문명의 화려한 유혹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이 공간에서는 억압을 수반하는 해방과 야만을 동반하는 문명, 서구 모던의 세련된 생활 스타일과 중국인 특유의 전통문화가 각 도시 기반과 어우러져 다양하게 발전했다. <중국 개항도시를 걷다>는 중국 고대의 전통 대외무역항과 근대의 국제 통상항을 아울러 살피기에 우리는 고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개항의 역사적 흐름과 함께 현재 중국의 모습을 동시에 만나게 될 것이다.
식민화와 현대화가 혼재된 이 독특한 도시풍경을,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흐름을 다방면에서 천착한 지은이들이 개별적으로 풀어냈다. 중국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한국사, 건축학, 인류학, 문학 등을 전공한 연구자들이 고대에서 현대를, 역사.문화.사상을 넘나들며 이들 개항도시로 대표되는 현대 중국의 도시문화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중국 안의 작은 서양‘개항장’
―중국‘근대로의 시간여행’, 1840년 아편전쟁 이후 또 다른 불평등 속으로
1839년 3월 모든 외국무역을 전면 중단시켰고, 광주에 있던 350명의 외국인들을 모두 상관에 가두었다. 외국 상인들은 결국 2만 상자가량의 아편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는 풀려났다.
임칙서는 즉시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들에게서 압수한 아편 1,400톤가량은 물, 소금, 석회가루에 섞어 녹인 후 바다로 흘려보냈다. 당시 이를 위해 판 구덩이는 깊이 2미터, 둘레 46미터짜리 3개였고, 압수한 아편을 녹이는 데에만 20여 일의 시간이 걸렸다.… 임칙서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는지, 이 광경을 지켜본 외국인을 두고 “(그들은) 감히 불경스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저는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그들이 진심으로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한 아편상은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에) 요구할 배상금액을 올려주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로 여겼다”고 회고하였다.
임칙서의 말에는 야만스런 오랑캐를 교화했다는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나 있지만, 그가 교화했다는 오랑캐들은 정반대의 입장에서 근대적 국제 관계에 무지한 야만스런 중국을 개화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다. 이질적인 두 문명이 동일한 사태를 계기로 서로를 문명화시켰다고 여기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아편과 은 그리고 전쟁」, 127~128쪽(그림은 120쪽)
가 다루고 있는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또는 ‘중국 안의 작은 서양’의 존재는 그 자체로 중국 근대 개항도시의 독특한 풍경을 이루며 역사.문화적인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책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HK) 답사팀이 중국의 개항도시를 답사하고 그 결과물을 정리하고 다듬은 것으로, 광주.하문.천주.영파.상해 5개 개항도시를 다룬다. 아편전쟁 이후의 통상항에는 복주가 포함되나, 천주로 대체했다. 천주는 광주, 영파와 함께 고대의 3대 시박항이자 해양 실크로드 기점의 하나로 대외무역항으로서의 오랜 전통적 지위를 갖는다. 고대의 전통적인 대외무역항과 근대의 국제적인 통상항을 아울러 살피는 이 책을 통해 고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개항의 역사적 흐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개항장들, 근대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새 익숙하다고만 여겼던 중국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은 여러 의미에서 근대의 획을 긋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중화의 빗장이 풀리게 된 것이다. 중국은 계속 명맥을 유지하던 조공체제를 타파하고 당대(唐代) 이래의 시박무역 전통을 종결시켰다. 이로서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국제 질서체제에 편입되었다. 불평등한 ‘화이질서’에서 또 다르게 불평등한 ‘제국주의’에 편입된 것이다.
이 시기에 체결된 중국과 서구 열강 사이의 조약들은 재편된 중외(中外) 질서의 역학 관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새로운 불평등은 열강들의 ‘준통치권’을 행사하는 특권 제도를 양산했고, 조계 제도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주거와 통상무역 활동을 보장하는 외국인 거류지의 차원을 넘어 속지 관할권과 시정권(市政權)을 장악함으로써 중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형식을 띠었다. 1842년에 체결된 남경조약으로 청 정부는 광주(廣州, 광저우).복주(福州, 푸저우).하문(厦門, 샤먼).영파(寧波, 닝보).상해(上海, 상하이) 5개항을 개방했다. 가장 먼저 조계지가 설정된 상해의 경우, 1843년에는 영국 조계지가 1848년에는 미국 조계지, 뒤이어 1849년에는 프랑스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1863년에는 다시 영국과 미국의 조계지가 공공 조계지로 합병되었다.
조계지 이후 개항도시들은 분절되고 다변화된 도시공간의 특수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분되거나 삼분된 각국의 조계지와 공공조계지, 중국 당국의 관할구역인 화계(華界), 다시 겹겹의 경계로 나뉜 탓에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적.행정적.문화적으로 극심하게 분열된 구조를 가진다. 그 복잡한 도시에서 중서 융합, 신구 결합을 기조로 서구의 현대적인 생활 스타일과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문화 양식이 혼재되기 시작했다.
■ 문명과 야만.억압과 자유.전통과 첨단이 소통 혹은 충돌하는 국제도시
<중국 개항도시를 걷다>는 남단인 광주에서 하문.천주. 영파.상해로 올라가는 경로를 따라 각 도시별로, 5부로 구성되었다. 답사기임에 분명하지만, 여정 기록에 급급한 기행문의 형식은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다방면의 지은이들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동일한 장소를 개별적인 이야기들로 쪼갰다. 그리고는 다시 저마다의 독창적인 공간으로 재창조했다. 그래서 이색적이고 동시에 이질적이다.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 침투하고 혼합된, 중첩되고 중층적인 개항도시와 닮은꼴이다.
어느 장을 느닷없이 펼친다 해도 이 책은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낼 것이다. 도시 자체의 구조인 외탄과 조계지, 기루와 리농과 같은 주거 공간, 아랍인과 유태인이 특히나 활발하게 이룬 국제 상권, 진씨서원과 이탁오라는 인물을 통해 본 사상적 특징, 화교문화나 마조 신앙이 대두된 국내외 정세, 음반.광고.출판에 나타난 당시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특색 등등. 게다가 답사현장의 사진뿐 아니라 고지도나 삽화와 도면 등이 어우러져, 마디마디 분절되고 겹겹이 접힌 중국 개항도시들의 면면이 다각도로 펼쳐질 것이다.
중국의 개항도시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탄이라는 선형적인 공간 구조를 갖는 반면, 한국의 개항도시들은 이러한 선형적인 구조의 외탄이 발달하지 않고 마치 광주의 사면처럼 격자형의 도시가 발달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외탄이 식민지의 잔재라기보다는 상업적인 공간이었다는 인식이 강한 반면, 한국의 개항도시는 식민지의 유산이라는 인식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는 개항장의 공간이 식민 잔재와 함께 청산의 대상이 되었던 반면, 중국의 외탄은 번성하였던 근대기 상업 공간의 유산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개항도시 공간의 전형, 외탄」, 40~42쪽(그림은 39쪽)
리농은 독특한 골목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은 남향을 한 집들이 옆으로 서로 맞붙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간혹 동서향을 한 집들이 남북 방향으로 늘어서 있기도 하다. 원래 리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주거공동체의 물리적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농이란 그 단지 안에 있는 골목을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