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제, 우리도 좋은 산문 선집 한 권쯤은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에게 삶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산문집은 참 드물었다. 그러나 좋은 작가, 좋은 글은 무척 많다. 그들을 한자리에 오롯이 모았다. 김소연, 김연수, 성석제, 오은, 서효인 작가 등 시인과 소설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글부터 강광석, 류상진, 박성대, 유소림, 최용탁 작가 등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진 글까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노동과 삶과 내면의 풍경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특히 사라진 것, 잊혀진 것, 기억해야 할 것들을 꾹꾹 눌러서 담았다. 그 글들은 눈으로 보아도 좋았고, 소리 내 읽어도 좋았다. 이 산문의 향연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책은 어떻게 준비되었나? 시작은 단순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작가 S의 글을 보았다. 제목이 <대보름>이었다. 참 좋았다. 그런 글들이 모아진 책은 없나, 찾아보았다. 볼만한 시 선집은 많은데 괜찮은 산문 선집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대개는 문학 교과서, 국어 교과서의 보조 노릇을 할 따름이었다. 특히 삶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글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글들을 모아보자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 책은 준비되었다. 대다수 생활인이 공감하고 즐길 만한 산문들을 한곳에 모아보고 싶었다. 드디어 작업에 들어갔다. 난관은 곳곳에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다루어야 할지, 누구를 넣고 누구를 넣지 말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 등 끝이 없었다. 뭔가 선별의 기준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기준. 누구의, 어떤 글을, 왜 수록했는가, 하는 기록 우선, 다루는 시기를 최근 10여 년으로 한정했다. 모든 산문을 한없이 살펴볼 수 없기에 현실적으로 작업 가능한 시기를 정해야 했으므로. 대략 2000년 이후부터, 동시대의 것이라 부를 만한 글들을 담았다. 다루는 내용에는 별 제약을 두지 않았다. 노동, 생활, 취미와 취향 등 넓은 의미에서 ‘인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최대한 망라하고자 했다. 생활과 노동에 대한 존중, 타자(사람일 수도 있고 또 자연일 수도 있겠다)에 대한 배려심이 담긴 글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작가들을 고르고 정하는 기준은 따로 없었다. 시인, 소설가라고 부르는 전문작가만이 아니라, 다양한 현장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담고 싶었다. 그에 더해, 생존작가들로 한정했다. 끝이 없을 듯해서였다. 그래서 전우익, 권정생 선생 등의 빼어난 산문이 아쉽게도 빠졌다. 또 아주 짧은 글이 아니고는 작가당 두 편 내외로 정했다. 고른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과 잡지는 물론, 월간지.주간지.계간지 및 인터넷 매체들 그리고 해당 기간에 나온 단행본들에 실린 글을 검토 대상으로 했다.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그렇게 모아진 작가와 그들의 글은 다양했다. 고향과 가족을 다룬 글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다. 많은 작가가 그 이야기를 주되게, 절절히 했다. 그때의 고향과 그때의 가족이란, 추억과 기억이 녹아든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이면서, 또 그 단어로 상징되는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졌어도 한때는 분명 존재했고, 그 기억과 경험 때문에 오늘을 사는 힘과 위로를 받는 그것. 또 그 시기 동안 벌어진 사회적 사건들과 직접 관련된 글이 많았다. 당사자의 글도 있고,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그 사안에 대해 작가가 분명한 삶의 태도와 문학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4대강 개발사업에 반대하는 글, 용산참사에 분노한 작가들의 글, 대추리와 밀양 등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또는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기록한 글들이었다. 주로 3부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의 글들이다. 특히 박정애의 <내 유년의 강, 명포를 추억하며>, 최용탁의 <내 마음속 남한강>, 이영주의 <파괴된 강에서 우리는 작별한다> 등은 2011년에 나온 《강은 오늘 불면이다》에 실린 글들로, 당시 한국작가회의 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에서 기획한 산문집이었다. 그것들은 자체로도 순정하고 아름답지만, 그런 맥락을 고려하고 본다면 여러 겹의 독해가 가능한 글이다. 한편 작가들의 작품의 원형이랄까, 주요한 경향을 짐작할 수 있는 글도 여럿이다. 김연수의 <내리 내리 아래로만 흐르는 물인가, 사랑은>, 김중혁의 <빵차 습격사건>, 백가흠의 <아버지와 나는 이제, 페친이다>, 김선우의 , 김별아의 <아버지라는 이름의 낯선 남자>, 오은의 , 송경동의 <그 잡부 숙소를 잊지 못한다>, 박수정의 <기억 속 집>, 서효인의 <증명하는 인간> 등은 해당 작가의 과거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의 삶과 글에 대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게 해준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유독 음식을 다룬 글이 많다는 점이다. 전면에 등장시키거나, 아니면 중요한 매개체로 음식을 등장시킨 글이 많았다. 요리사 박찬일의 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러 국수, 김현진의 순대, 김중혁의 도나스와 옥수수빵, 성석제의 갱죽, 이정록의 사과, 공선옥의 각종 쑥음식은 단지 허기를 채워주는 양식만이 아니다.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친근하고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눈여겨볼 글이 몇 있다. 강진에서 농부이자 활동가로 일하는 강광석, 보성에서 우체부로 일하는 류상진, 퇴곡리에서 농사를 짓는 유소림, 또 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의 글들이다. 직접 몸을 움직여 일하며 생활하는 이들의 글은 울림이 크고 깊다.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공감대를 만들어가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짧은 단상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 책을 만드는 데도 여러 분의 힘이 보태졌다. 특히 시인들의 우정이 인상적이었다. 진은영 시인이 오은 시인을, 오은 시인이 김언 시인을, 김언 시인이 이영주 시인을, 이영주 시인이 김중일 시인을 추천해주셨다. 그분들을 포함하여 도움을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어쨌든 출발은 했다. 부디 이 책의 출간이, ‘산문 르네상스’의 작지만 의미 있는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후 기회가 닿는다면 서문 선집, 발문 선집, 해설 선집, 서평 선집, 시론 선집 등 갖가지 확장된 산문의 향연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