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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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쓴다 우리에게는 기꺼이 뒤에 서고 싶은 빛나는 계보가 있다 1950년대 한국 영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첫 30년 동안은 영화 현장에서 배우를 제외하고는 여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 다섯 명의 감독과 몇 십 명의 스태프만이 이름을 남긴 첫 번째 30년을 지나, 1990년대 이후 두 번째 30년을 거치며 영화 현장에는 무수히 많은 여성이 등장했다. 1994년 여섯 번째 여성 감독으로 데뷔한 임순례의 뒤를 잇는 여성 감독들뿐만 아니라 제작, 촬영,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마케팅 등 영화의 모든 영역에서 활약하는 여성 창작자들이 한국 영화의 영광의 순간들을 함께 만들어왔다. 미디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과 배우들이지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에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수많은 스태프들이 참여했고 그들의 상당수는 여성이었다. 예컨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접속〉과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획자는 심재명이었고, 〈쉬리〉의 편집감독은 박곡지, 마케터는 채윤희였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아니었다면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최동훈, 김지운의 영화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000만 영화인 〈도둑들〉과 〈암살〉의 빠르고 리듬감 있는 장면 전환은 신민경 편집감독의 손에서 나왔고,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오가며 영화제 프로그래밍 매뉴얼을 확립한 사람은 김영덕 프로그래머였다. 대담한 제작자 강혜정은 〈베를린〉, 〈베테랑〉, 〈엑시트〉 등의 대작 영화를 연달아 흥행시켰고, 봉준호의 〈마더〉, 〈설국열차〉, 〈기생충〉은 마케터 박혜경과 만나 전 사회적인 화제성을 얻었다. 〈우리들〉, 〈소공녀〉, 〈공동정범〉 등 최근 주목받은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상당수는 여성 제작자나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촬영이나 조명, 사운드 분야에도 이제 여성이 드물지 않다. 지난 30년간 꾸준히 활동해왔음에도 이들의 존재는 특별한 혹은 불편한 예외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영화는 감독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공고한 현실에서 여성 감독의 숫자는 여전히 10퍼센트 내외에 그칠 뿐이고, 카메라나 조명 기기를 든 여성, 사운드를 다루는 여성은 실력을 의심받거나 기회를 잃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작가’로서의 감독이 중심에 놓이는 영화 비평이나 영화사 서술은 자연히 남성의 계보가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성 영화인의 활약을 ‘예외’가 아닌 ‘역사’로서 서술하는 일은 여성 영화인 스스로 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2001년 이미 한 차례 『여성영화인사전』이라는 작업을 통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약한 모든 여성 영화인의 이름과 활동을 정리한 바 있는 여성영화인모임에서는 이 책을 통해 1990년대 이후 맞이한 두 번째 30년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러면서 1950년대 영화 일을 시작해 1980년대 최초의 여성 영화인 모임인 ‘영희회’를 조직했던 이해윤과 이경자로부터 2020년 오늘에 이르는 ‘영화하는 여자들’의 계보를 그려 보였다. 영화계 안에 여성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첫 번째 30년에서는 모두의 이름을 다 밝혀 적는 사전의 형식을 택했지만, 두 번째 30년을 담은 이 책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영화 현장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인물들을 선정해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방식을 취했다. 영화계에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고 검열 제도가 폐지되고 전통적인 도제 시스템이 무너지는 가운데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와 이를 환영하는 관객들이 등장한 1990년대, 영화의 전 영역에 걸쳐 세계적 수준의 전문가들이 등장해 한국 영화의 질적, 양적 수준을 모두 끌어올린 2000년대,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창작자들이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2010년대 이후라는 3부의 구성 속에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여성 영화인 20인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위인’이나 기회를 빼앗긴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한국 영화의 발전을 이끌어온 중추로서 여성 영화인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담은 이 책은 이제 여성의 성취만으로도 역사를 쓸 수 있음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일 것이다. 더 이상 영화 현장에서 여성이 꿈꿀 수 없는 분야는 없다 제작, 연출, 연기, 촬영,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마케팅,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제 프로그래밍…… 영화의 전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특정 전문 영역에서가 아니라면 별달리 조명 받지 못했던 현장 스태프들의 구체적인 일과 전문성, 직업인으로서의 고민과 노동 환경의 변화까지를 폭넓게 담아냈다는 것이다. 감독이 그리는 큰 그림 안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로만 비춰지던 스태프들이 이 책에서는 영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이자 창작자로서 애정과 자부심을 담아 자기 일을 소개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촬영감독의 의도에 따라 영화의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조명감독은 어떤 고민을 하게 되었는지, 편집감독은 영화의 속도와 리듬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미술감독이 총괄하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고민하는 윤리적 태도,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를 맞닥뜨린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고민, 30년간 영화 현장의 역동적인 변화를 기록해온 영화 기자의 통찰에 이르기까지 영화 산업이 포괄하는 모든 영역의 일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은 좀 달랐어요. 우리끼리는 그 작품을 농촌 느와르라고 불렀는데, 한국적인 느와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후반 작업이 아니라 촬영에서부터 미술적인 요소들의 톤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시각 요소를 컨트롤해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의상, 소품, 세트 등을 총괄할 수밖에 없었죠. 저보다 훨씬 오래 일하신 분들도 있으니 모두의 동의를 얻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 류성희(미술감독), 175쪽 디지털이 필름에 비해 제작비가 덜 든다는 얘기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것 같아요. 찍어보니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더 예민하고, 빛을 받아들이는 저장 방식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고, 깊이감을 표현하는 게 다르다 보니 필름만큼 우아한 그림을 내려면 더 많은 라이트를 써야 하고 더 많은 디테일이 필요해요. - 남진아(촬영 및 조명감독), 211쪽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면서 캐릭터 위주의 편집을 배우게 되었어요. 영화 작업에서도 ‘배우만 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죠. 그전에는 스토리, 카메라의 언어, 미술의 언어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배웠는데, 뮤직비디오에서는 카메라가 이미지 라인을 넘어가도 상관없고, 뭐 정말 법칙이 없어요. 음악의 가사와 감성, 악기의 비트에 따라 너무나 자유로운 거예요. 사운드가 중심이기 때문에 컷을 엄청나게 많이 써도 거슬리지가 않아요. 영화는 하나하나 따박따박 완성해가는 언어라면 뮤직비디오에서는 그냥 좋으니까 쓸 수도 있는 거죠. 그 훈련을 많이 해서 제가 지금도 ‘그냥 좋아’ 이런 거? (웃음) 어떤 비논리적인 연결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신민경(편집감독), 223쪽 이 책에서는 표준근로계약서와 이른바 ‘주 52시간 근무제’가 자리 잡으면서 영화 현장에 찾아온 변화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영화는 이들에게 예술이자 꿈이지만, 직업이자 생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야근이나 밤샘 작업이 일상이던 1990년대에 영화 일을 시작한 세대와 최근 10년 사이 영화계에 진입한 세대 간의 미묘한 시각차가 엿보이기도 하고, 사운드나 편집 등 후반 작업 분야의 노동 환경은 상대적으로 변화가 더디지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업계 전체가 함께 노력하는 모습은 모든 산업계의 귀감이라고 할 만하다. 일단은 저녁이 있는 삶이 되었죠. 그동안은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