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타오르는 저 불길에 타 죽고 싶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우물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불이든 물이든 간에 나 자신을 그녀에게 던질 용기는 없었다.”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솜브레로 모자를 쓰고 칠레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낭만적인 시인 네루다. 젊은 시인은 지독한 수줍음에 시달렸지만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그 시절 산티아고의 로맨스를 담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사랑에 빠진 전 세계 연인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과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었다. “성숙한 작가는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다.” 어려운 미학적 향연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네루다가 도달한 곳은 바로 민중이다. 네루다는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노래하고 투쟁했다.” 체 게바라는 밤마다 동료 게릴라들에게 네루다의 시를 읽어 주었다.
시인, 외교관, 망명자,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로서 그의 양심은 평안했고 그의 지성은 불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루다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시인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8장 암담한 조국)
1904년 7월 12일 칠레 출생. 아버지는 기찻길을 사랑하는 철도원이었고, 어머니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일찍 여의었다. 열 살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가명으로 시를 발표했고(1920년부터 썼던 필명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결국 정식 이름이 된다.) 한동네 살았던 시인 가브리엘 미스트랄의 서재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 탐독했다. 젊은 날 지독한 수줍음에 시달렸지만 연애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낭만적인 보헤미안 청년에서 민중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세 번의 결혼, 빈궁한 외교관 생활과 여행, 도피와 정치 망명을 겪어야 했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는 이 파란만장한 삶 중에서도 특히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 사건, 사랑 그리고 창작과 비평에 관한 견해를 담았다. 또 이와 더불어 가르시아 로르카, 피카소, 에렌부르크, 네루, 엘뤼아르, 카스트로, 체 게바라, 아옌데 등 여러 인물들에 대한 단상을 풍부한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내고 있다.
열여덟 살에 사범대학교 진학을 위해(불문학 전공) 산티아고로 상경한 네루다는 아버지의 철도원 망토를 두르고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쓰면서 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네루다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4년 시적 웅대함을 포기하고 소박한 표현과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추구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다. 이 시절, 네루다가 기억하는 친구들 중에는 항상 소를 끌고 다니며 동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농부 시인, 프로레슬링 선수에게 도전했다가 비참하게 당하고 나서 시집 헌사에 “나를 죽이라고 고함쳤던 4만 명의 개자식들에게”라고 쓴 엉뚱한 철학자, 해표 가죽으로 큰돈을 벌겠다며 네루다를 사업에 끌어들인 가짜 시인 들이 있다.
1927년 한 부자 친구가 네루다를 예술의 나라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며 외교관으로 추천했지만, 네루다의 첫 발령지는 듣도 보도 못한 랑군(지금의 미얀마)이었다. 영사가 된 것을 축하하러 모인 친구들 앞에서 네루다는 조금 전에 들은 자신의 부임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외교관이 된 네루다는 아시아에서 귀족들과 외교관 사회에 신물을 느끼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 1935년 이때 느낀 고독을 담은 『지상의 거처』는 또 한 번 시인의 저력을 보이는 수작이다.
★ 육감적인 연애 시인에서 위대한 민중 시인으로 거듭나다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르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4장 빛나는 고독)
1936년 7월 19일 밤, 네루다의 친구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네루다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시」를 썼고, 이 시에서 로르카의 병원을 파랗게 칠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청색이 제일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로르카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어떤 자리든 얼굴만 내밀어도 분위기가 살아났습니다.” 네루다의 청색에는 그런 가르시아 로르카의 마술적인 힘이 담겨 있다. 네루다는 공화군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스페인주재 칠레 영사 직에서 잘렸다. 로르카의 죽음은 긴 내전 기간 네루다가 겪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고, 내전 중에 어렵게 인쇄한 시집 『가슴속의 스페인』은 이제 몇 권 안 남았는데, 그중 한 권이 워싱턴 국회도서관의 20세기 희귀본 진열장에 놓여 있다. 네루다에게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스페인 내전 이후의 네루다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더 이상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칠레 정권이 진보적인 인민전선 정부로 바뀐 후에 새롭게 이민국 관리 담당 영사가 된 네루다는 공무원들의 온갖 훼방을 물리치고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들을 칠레로 망명시켜 주는 역사적인 일을 해낸다.
네루다는 특히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위대한 장인, 진정한 시인으로 여긴다. 알베르티는 “위기의 순간에 시는 유용한 공공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점에서 마야코프스키와 유사하다. 유용한 공공재로서 시는 힘, 기쁨, 진정한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갖지 못한 시는 소리야 나겠지만 노래하지는 못한다. 알베르티 시는 항상 노래한다.” 네루다는 이제 휴머니즘으로 돌아선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이제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쓰기 시작한다.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5장 가슴속의 스페인)
1943년 스무 살 연상의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하는데, 그녀는 네루다의 정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탈리아 소설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이 1945년 3월 네루다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했고, 네루다는 7월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칠레 노동자들은 달나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른 바위산에서 하얀 비료(초석)와 붉은 광물(구리)을 캐며 열악한 생활을 했다. 항상 더러운 물과 기름이 고여 있는 작업장 바닥에 고작 널빤지 하나 깔기 위해 노동자들은 8년 동안 열다섯 번 파업하고 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