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기획
“처벌받아야 할 것은 행위인가, 행위자인가?”
_형벌의 정당성을 예방에서 찾아낸 사유의 대전환
형벌 제도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독일의 형법학자 프란츠 폰 리스트(Franz von Liszt, 1851~1919)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그는 국가 형벌권의 근거를 범죄의 예방에 둔 형법사상을 발전시켰는데,「형법의 목적사상」이라는 기념비적인 강연에 그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강연은 1882년 리스트가 마르부르크 대학 취임 기념으로 했던 것으로, 이 책『마르부르크 강령』은 그 강연 원고를 텍스트로 하고 있다.
리스트의 형벌 이론은 “처벌받아야 할 것은 개념(행위)이 아니고 행위자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재범 방지 즉, 범죄의 예방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경우 형벌의 관심은 범죄가 아닌 범죄자에게 집중된다. 리스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사상은 현대적 형법 이론과 형법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총 6개 장으로 구성된 강연 원고에는 리스트 형법사상의 세밀한 내용은 물론, 형벌론을 둘러싼 당시 독일 형법학계의 첨예한 논의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형벌의 발생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왜 형벌을 부과해야 하는지 등 형벌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범죄와 형벌에 관한 사유로 이끈다. 한편 그 논의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형벌 제도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사제지간인 고려대 심재우-윤재왕 교수의 번역에 차병직 변호사가 해제를 단 이 책은 일상의 도처에서 범죄를 보고 듣는 우리가 “사회의 한 면을 종전과는 다른 통찰과 판단력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안내판이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형사재판을 하고 있다. 신문이든, 전광판 한 줄 뉴스든, 포털사이트든 보도를 통해 숱한 사건을 접한다. 사건의 대부분은 범죄다. (……) “형법은 정의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한 대답이다.” 분명히 엄청난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처벌을 피해 가는가 하면, 사소한 실수가 틀림없는데 지나친 제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 먼산을 바라보며 세상을 재판하면서도, 감정적 대응보다 가끔 그 이면을 생각해보는 일도 권장할 만한 미덕이다. 아마도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사회의 한 면을 종전과 다른 통찰과 판단력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르부르크 강령』은 바로 그런 도움을 주는 적절한 메시지다. 법률가에게는 필독서인 이 작은 책이, 세상에 관심 있는 보통 사람에게도 읽을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차병직 | ‘리스트의 생애와 목적사상’에서(pp.166~168)
“왜 형벌을 부과하는가?”
형벌의 근거를 밝히기 위한 긴 싸움의 궤적
―형벌론과 리스트의 목적사상
리스트는 형법학의 역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놓은 학자이다. 그는 종래까지 지배적이었던 응보형 사상을 목적형 사상으로 대체시키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았는데, 형벌은 응보로서의 자기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법익 보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응징에만 그치는 응보형은 소박한 정의 감정을 만족시킬 수는 있어도 결코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은 할 수 없으며,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변화시키려면 목적의식과 목적사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응보형 사상은 범죄자에게 범죄 행위만큼의 고통을 주는 데 형벌의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형벌관이다. 형벌에 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벌 자체가 목적이므로 절대설이라고 하며, 범죄자가 저지른 ‘범죄’에 관심이 집중된다. 반면 목적형 사상은 범죄가 아닌 ‘범죄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범죄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이를 응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미래의 범죄를 예방하는 차원까지 나가야 형벌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방을 강조하는 만큼 범죄의 정도보다는 범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관심을 갖는다. 형벌을 범죄 예방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상대설이라 부른다. 범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형벌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벌론의 역사는 결국 형벌의 근거를 밝히기 위한 긴 싸움의 궤적으로 구파 대 신파, 고전학파 대 현대학파, 절대설과 상대설의 대치는 바로 응보형과 목적형의 팽팽한 평행선이었다. 리스트의 형벌론은 신파의 목적형을 대표하지만 형벌에서 응보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는 등 응보형을 완전히 배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형벌은 법익 보호이다. 하지만 왜 형벌은 법익 보호인가? 형벌은 어떤 식으로 법익을 보호하는 작용을 하는가? 형벌 안에 있는 추진력은 무엇이고 형벌의 직접적 결과는 무엇인가? 이 추진력을 통해 어떠한 종국적 결과가 발생하고, 이 결과는 직접적 결과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 이러한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대량의 관찰을 수행하는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넓은 의미의 범죄통계학만이 우리를 목표로 이끌어갈 수 있다. 우리가 형벌의 법익 보호적, 범죄 예방적 작용을 과학적 확실성에 따라 확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범죄를 사회적 현상으로, 형벌을 사회적 기능으로 고찰해야 한다. ―p. 89
형벌의 정당성을 범죄의 예방에서 찾은 리스트는 롬브로조와 가로팔로, 페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인류학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범죄자의 계보를 통계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범죄의 원인을 실증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범죄 예방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리스트는 범죄자를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이에 상응하는 세 가지 형벌의 적용을 주장했다.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반대학파들과의 논쟁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리스트는 “범죄를 사회적ㆍ윤리적 현상으로, 형벌을 사회적 기능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리스트의 이러한 목적사상은 1975년 새 독일 형법에서 큰 결실을 맺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의 형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책의 말미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법학자들에 대한 소개글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