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건강, 그리고 바이오텍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CF)은 희귀 유전병이다. 낭포성 섬유증에 걸린 환자에게는 폐와 기관지, 소화관 등에 끈적이는 점액이 쌓이는 증상이 나타난다. 끈적거리는 점액은 환자의 정상적인 호흡과 영양분 흡수를 방해하는데, 이로 인해 환자의 기대수명은 20대 정도에 그친다. 그런데 미국의 바이오텍 버텍스 파마슈티컬스(Vertex Pharmaceuticals, 이하 버텍스)는 낭포성 섬유증 치료제 ‘칼리데코’를 개발했다.
버텍스 구내식당에는 이와 관련된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알 수 없는 화학 구조식이 그려진 발등 사진이다.(<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본문 238쪽) 사진의 주인공은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그는 버텍스가 개발한 칼리데코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칼리데코의 화학 구조식을 발등에 문신으로 새기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 둘레에는 칼리데코 개발에 참여한 신약개발 연구진이 자신들의 서명을 남겼고, 버텍스는 이를 액자로 만들어 자랑스럽게 걸었다. 이 장면은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텍은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영리 기업이지만, 이들의 일이 가지는 가치는 매출과 영업이익과 시가총액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생명을 구하고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이 귀한 가치다.
그런데 모든 바이오텍이 신약개발이라는 귀한 가치에 도전하지만 모두 성공하진 못한다. 바이오텍의 신약개발이 가장 활발한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약 5,000여 곳의 바이오텍이 있지만 1년에 신약으로 세상에 나오는 물건은 많아야 10개 남짓이다. 개발하기만 하면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구하고, 엄청난 부와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바이오텍의 신약개발. 그런데 왜 어떤 바이오텍은 신약개발에 성공하고, 어떤 바이오텍은 그렇지 못할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이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거품(bubble)과 가치(value)를 구분해낼 수 있을까?
저자 김성민은 바이오 제약 기업들의 동향,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약개발 현황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다. 첨단 과학과 기술이 핵심인 제약 산업과 신약개발의 특성상, 저자는 바이오텍과 제약기업들이 발표하는 논문과 임상시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에 집중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기사를 쓰기 위해 분석한 컨텐츠가 휘발되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신약개발에 도움이 될지 모를 컨텐츠가 흩어지기 전에, 쌓고 모아서 책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신약개발에 쓰이는 첨단 과학과 기술에 대한 해설(<바이오사이언스의 이해> 1판[2017], 개정2판[2023]), 알츠하이머 병 신약개발과 같은 도전적인 연구 현황에 대한 조망([2019]), 진단과 의료 AI처럼 한국이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 대한 소개([2020]), 암 치료제의 개념을 바꿔가고 있다고 평가되는 면역관문억제제 키트루다의 개발 스토리([2022])는 지난 7년 동안 저자가 매일 생산했던 분석 컨텐츠를 책으로 고정시킨 작업들이었다.
저자는 네 권의 작업을 끝내면서 신약개발에 도전하는 바이오텍에 거품(bubble)이 끼어 있는지, 아니면 가치(value)가 담겨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신약을 개발하는 사람, 신약개발에 투자하는 사람, 취재를 계기로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바이오텍의 가치 유무를 궁금해 했다. 이 궁금증은 바이오붐과 바이오 투자 빙하기를 반복적으로 일으켰다. 도대체 바이오텍에 거품이 끼었는지 아니면 가치가 숨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단 족집게 도사처럼 유망한 바이오텍을 골라내거나 핵심 체크리스트를 제공하는 방식은 아니어야 했다. 그간의 작업이 논문과 임상시험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접근이었듯이, 버블과 밸류를 구분하는 작업 또한 과학적이어야 했다. 저자는 우선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때 가치가 있으며, 당분간의 미래까지 가치가 있을 바이오텍을 골라내기로 했다.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꽤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버텍스와 리제네론 파마슈티컬스(Regeneron Pharmaceuticals, 이하 리제네론)는 1980년대 후반,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바이오텍이다. 이 두 바이오텍은 2024년 초 나란히 시가총액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시가총액 1,000억 달러는 전 세계적인 제약기업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ristol Myers Squibb, BMS)나 화이자(Pfizer)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BMS와 화이자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에 비해 규모, 매출, 역사 등 모든 면에서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 십 배가 큰, 전 세계적 규모의 제약기업이다. 그런데 버텍스와 리제네론은 이런 거대 제약기업들과 시장에서 비슷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즉 시장이 버텍스와 리제네론에 내린 평가는 ‘가치가 있다’였다. 버텍스와 리제네론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이 어떤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실패를 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두 바이오텍도 분명히 보통의 바이오텍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따라서 버텍스와 리제네론이 겪었던 실수를 찾아내고, 이들이 어떻게 실수를 극복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버텍스와 리제네론도 다른 좋은 바이오텍들이 빠졌던, 일종의 확증편향과 같은 함정에 빠졌다. 첨단 과학과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디어와 가설을 세우고 이것을 입증해나가는 과정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나는 모험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는 바이오텍에는 자신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 아이디어와 가설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확신이 왜곡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에 빠지기 쉽다. 특히 과학을 열심히 하는, 좋은 바이오텍일수록 이런 함정에서 잘 빠진다.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 성실했던 연구, 자신의 가설과 아이디어로 신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이미 투자한 비용과 시간에 대한 미련은 바이오텍이 편향된 행동을 하는 쪽으로 이끈다. 가설과 아이디어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피하고, 그 이외의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다. 버텍스와 리제네론 모두 이와 같은 덫에 걸렸지만, 긴 시간에 걸쳐 실패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바이오텍의 탈출 비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좋은 바이오텍에서 위대한 바이오텍으로>는 버텍스와 리제네론의 탈출 비법이 ‘좋은 과학을 위대한 과학으로 바꾸는 것’이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한다.
사실은 좋은 과학에서 위대한 과학으로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신약개발도 바이오텍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사람에 대한 관찰에도 집중한다. 버텍스를 설립했던 의사이자 과학자 조슈아 보거, 그의 뒤를 이어 오늘의 버텍스를 디자인하고 구현한 제프리 라이덴의 생각, 판단,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버텍스가 왜 환자의 수가 적어 시장성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 희귀 난치성 유전병 치료제 개발에 뛰어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버텍스의 사람들은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