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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사유의 두 핵심 : 유대신비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사상의 양대 축은 유대신비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이다. 특히 그의 사상과 이론에서 신학적 사유가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게서 신학적 사유가 다소 명시적으로 드러난 개념들은 신학(적인 것) 외에 신적인 것, 신성한 것, 계시, 진리, 메시아적인 것, 희망, 구원 등인데, 이 개념들은 그와 연관되는 다른 개념들, 이를테면 유토피아, 행복, 신화, 정의와 법, 죄와 속죄, 혁명 등과 내밀하게 변증적으로 얽혀 작동한다. 게다가 이 개념들은 서로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적 사유는 그의 언어철학, 역사철학, 정치철학, 예술론, 미학 등 모든 영역에서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폭넓게 작용하고 있고, 그의 사유 전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많은 벤야민 연구자들이 그의 사유에서 초기부터 일관되게 작용하는 역사철학을 ‘기억’(Eingedenken, 상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신학’(Geschichstheologie)으로 해석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히 그의 신학은 ‘유대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는 있지만, 그것은 유대교 자체나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정치적 시오니즘’)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다. 그에게서 “유대교는 결코 자체 목적이 될 수 없고, 정신적인 것의 중요한 담지자이자 대변자”였다.
벤야민이 보기에 카프카는 궁극적으로‘실패한’작가, 하지만 ……
문학비평가로서 벤야민이 다룬 작가들 가운데 유대교 신학이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내밀하게 작용하는 작가가 있다면 단연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일 것이다. 우리는 벤야민 역시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카프카에게 각별히 친화성을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카프카 연구를 통해 확장하고 변형해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벤야민의 카프카 연구의 모티프 전체가 신학적인 범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그 범주가 핵심 역할을 한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벤야민은 카프카 수용은 이미 카프카가 작품을 발표하던 시기인 1910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카프카 연구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과 카프카와 자신의 에세이를 두고 집중적으로 토론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자신의 구상에 참조하고 반영했다는 점이다.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베르너 크라프트(Werner Kraft),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등이 그들(이들 가운데 숄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이다.
벤야민은 카프카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작가라는 점은 힘주어 강조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카프카의 작품 중심에 ‘법’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하지만, 벤야민은 그에게서 법, 진리, 계시, 지혜, 가르침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면서 비유와 우화(寓話)를 통해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탐색한 측면을 중요시했다. 벤야민이 카프카의 유언을 작가 자신의 대단한 신비주의나 비밀주의로 해석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즉 그가 보기에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꺼린 것은 그 작품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지, 작품을 비밀로 간직하려는 의도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런 희망 없음 속에서 희망하기: 부조리한 희망
벤야민이 보기에 카프카의 작품은 전통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적인 경험과 현대 도시인의 경험이 서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초점이 있는 타원과 같다고 했다. 전통이 무너진 시대에 현대인으로서 왜소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그 누구보다 절박하게 체감한 카프카는 이러한 경험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는데,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친화성을 느낀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대의 ‘소시민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의 대척점에 있는 ‘부조리한 희망’(이것은 ‘구원받은 삶의 관점’과 연결된다)을 목도하고 기록하고 성찰한 데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벤야민이 보기에 카프카의 작품세계는 ‘도주 중에 있는 신학’(아도르노의 표현에 따르자면, ‘역[逆]신학’)이다. 즉 신, 계시, 법, 구원 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구원의 관점에서 소외가 극단화된 지옥 같은 현실의 절망적 상황을 구원의 관점에서 직시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다(이때 작가는 특히 ‘수치심’과 ‘놀라움’의 제스처로 그 상황을 대면하고 기록한다).
전통이 붕괴해 더는 진리나 지혜를 찾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카프카는 진리의 ‘전승 가능성’을 붙들며 우화와 비유를 통해 ‘가르침’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의 우화와 비유는 한편으로는 결국 ‘가르침’을 찾아내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떤 ‘가르침’도 넘어선다. 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카프카가 스스로 ‘실패’한 작가로 여긴 점도 이해되고, 후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카프카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희망’을 갈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벤야민이 보기에는 카프카는 희망 없음을 단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희망이 존재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문학에 ‘지속성과 소박함’을 되돌려주려고 한 카프카의 서사전략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동화가 ‘바보인 척’하면서 신화가 가져다준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했듯이, 카프카도 우화와 같은 옛 문학 형식을 활용하는 서사를 통해 현대의 ‘광기’와 그 신화적 ‘원시림’에서 탈출할 출구를 모색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