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정치

철학자, 도시계획자, 군사역사가 등 가지각색의 이력만큼 다각적인 사고체계로 '탈영토화', '노마디즘', '극의 관성', '내부식민화' 같은 신개념을 생성해낸 폴 비릴리오가 1977년에 주창했던 또 하나의 독특한 개념, '질주학'. 비릴리오는 이 책에서 '속도'를 비판이론의 핵심 주제로 부각시킨다.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 "정지는 죽음이다", "혁명은 일종의 과속이다", "산업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질주정 혁명'이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은 속도를 중심으로 역사철학, 정치철학을 재해석한다.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핵무기의 등장이 그 결정적 일례. 그리하여 현대사회는 안전을 위해 운동의 부재(속도의 제한)를 택했다. 한국어판은 비릴리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비릴리오 전문 연구자인 존 아미티지 교수의 논문을 실었고, 비릴리오의 이론을 세상에 널리 알린 들뢰즈와 카타리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여 세 이론가를 비교한 옮긴이 해설과 지은이 소개를 첨부했다. 불어판에 들어있지 않는 27장의 도판과 도판설명도 책읽기에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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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3.5
1️⃣ p.38 비릴리오가 자신의 친구 가타리의 정치 이론을 참조해 기술 공포증을 극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가타리는 현대의 기술이 제공해준 가능성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본 바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가타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계가 문장을 발화하고 10억분의 1초의 빠르기로 사실을 기록할 수 있다고 해도 기계가 인류를 지배할 우려가 있을 만큼 악마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기계를 외면할 이유는 없다. 강조하건대, 기계는 지배나 권력과 결부되어 인간들을 분열시키는 측면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주체성의 특정 측면이 극도로 발달되고 극도로 응축된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인류와 기계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 다리가 건설된다면, 인류와 기계는 새롭고도 확고한 동맹을 맺게 될 것이다(Guattari, 1996:94). 2️⃣ pp.49~50 19세기의 유럽 혁명가들은 거리를 통제하면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거리뿐만 아니라 국가까지 빼앗아갈 기술적 방식이 등장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인민 방어와 생태 투쟁』). 모든 혁명에는 역설적인 순환이 존재한다. 1848년 6월, 엥겔스는 이렇게 적었다. "파리 시민들의 삶이 강렬하게 순환하던 그 대로(大路)에서 최초의 회합이 열렸다."¹ 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웨버는 마치 자동차 충돌사고를 말하듯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언급했다. "그들은 거리에 호소했으나 거리는 그들을 죽였다."² 대중들은 주민도, 사회도 아니다. 행인의 무리일 뿐이다. 혁명의 분견대는 [공장이라는]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거리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¹ Friedrich Engels, "Details über den 23. Juni," Neue Rheinische Zeitung, No. 26, June 26, 1848: Marx-Engels Werke, Bd, 5, Berlin/DDR: Dietz Verlag, 1971, S, 112 ² Henri Weber, Le Marxisme et conscience de classe, Paris: Union Générale d'Editions, 1975. 3️⃣ pp.78~79 속도는 단어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에서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죽음에서 직접적으로 떨어져 나온 인간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로 돌격대, 다른 말로 신속한 군대가 저지른 대량 살상의 소름끼치는 표상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 그러나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시간을 향한 영구적인 돌격이 되어버린 이 혁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4️⃣ pp.87~89 세느강 기슭에 늘어서 있는 미국 자동차의 천박한 미적 감각, 끊임없이 변하는 지나치게 도발적인 차체와 장식은 영구적인 사회 혁명 (미국적 생활방식의 진척)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거대한 자동차 몸체는 무력해졌다. 그 자체의 도로 장악력도 불완전해졌고 강력한 동력기에도 재갈이 물렸다. 우리는 속도제한 법규뿐만 아니라 정부의 행위, 즉 대중의 동력화가 창출하는 "놀랄 만한 습격 능력"을 제한하려는 교통로의 정치적 통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운전자에게 강요된 이 좌절감(그는 알코올뿐만 아니라 갑작스레 빠른 속도마저 빼앗겨 버렸다), 즉 운송장치에 가해진 금지도 새로운 차원에 들어선 이 국가가 부과한 것이다. 1949년 바네버 부시는 『현대의 무기와 자유인』에서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고칠 수 있고, 마치 '햄' [아마추어 무선사]처럼 자체적으로 라디오 수신기를 제작하여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장거리 경주와 순환의 전문가들), 재주 있고 능력 있는 이 새로운 세대의 공학자, 전기학자가 존재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골목골목마다 자리잡고 있는 모든 차고, 모든 라디오 클럽은 일종의 훈련소, 즉 시련이 닥쳤을 때에 복잡한 전쟁 도구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곧장 전환될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는 장소이다."¹ 이렇듯 무지한 대중들의 운동 능력을 끊임없이 착취해 일종의 사회적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문제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민간 산업들이 대규모 군대에 필요한 신발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1792년의 경우, 맨발의 부대원들에게 모두 8만 켤레의 신발이 필요했으나 보급부대는 2백 켤레밖에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 처럼 "교전하지 않을 때조차 도보는 전략적 도구"였기 때문에 맨 처음에는 이런 종류의 습격(도보를 통한 습격)이 시간에 맞서 전개됐다. 게다가 이런 습격은 물자가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이론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존 질서의 반대파들은 노동자들의 '운송 시간'을 둘러싸고 투쟁을 벌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간 절약'이 다시 한번 문제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변신의 기원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1848년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세 개의 8시간 혁명' (8시간의 노동, 8시간의 수면, 8시간의 여가)을 마주 대하게 된다. 특히 이런 요구가 맨 처음 제기될 때부터 온건파에서 극단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 모든 혁명운동 사이에 통일성을 창출하는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들이 수행한 이 '시간 전쟁'은 "약점이라곤 전혀 없이 장점만을 두 루 갖춘 혁명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에트 공화국은 1917년 가을, 독일 공화국은 1918년에 이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 공화국은 5월 1일이 피로 물들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1919년의 이 날에는 또 다시 대규모 행진이 조직됐고, 정부는 이들의 구호가 오로지 8시간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회당 지도부는 권력의 임무를 잘 수행하지 않았던가?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무기성(武器省)을 이끌지 않았던가? 따라서 8시간을 인정한다는 것은 최후의 봉인을 보존하는 것, 즉 전쟁의 시기에 존재해왔던 신성한 동맹을 평화의 시기에도 유지하는 것이었다. ¹ Vannevar Bush, Modern Arms and Free Men: A Discussion of the Role of Science in Preserving Democrac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49, p. 134. * 한편, 이때 당시의 군수산업은 이미 5천 명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생산 집단을 고용하고 있었다. 5️⃣ p.118 "오늘날의 문명은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으로 선행했던 문명들과 구분된다. 속도라는 특징이 그것이다."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1930년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의 문명에 두 번째 특징을 가져왔다. 사건이라는 특징을,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상에서 벌어지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비행기나 기구)를 날게 만든다는 것은 추락의 발명이다. (『미지수』(2003)) 6️⃣ p.117 영국은 대서양의 불침하는 함대라는 지리적 특징과 더불어 운송 영역에서의 기술 혁신에,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속 엔진의 제작에 온 노력을 기울였다. 영국이 세계 최초의 거대 산업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감정과 혼동되기도 하는 기술적으로도 우월하다는 근본적인 감정" 을 자아내며 모든 나라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우위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지향점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산업 혁명' 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질주정 혁명'이 있었을 뿐이다. 민주정['인민' (demos/δημος)의 지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주정 ['질주' (dromos/δρομος)의 지배)이 있을 뿐이다. 전략('장군' (strategos/στρατηγός)의 명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질주학['질주'의 명령]이 있을 뿐이다. 7️⃣ p.120 인구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은 우월하고 지배적인 것처럼 여겨져왔다. 그들이 훨씬 더 빠르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둘러싼 대량 학살과 인종 말살에서도 서구인은 '생존자' (survivant)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인은 '매우 활발한 (sur-vif) 자였기 때문이다. 질주정 형태의 진보가 실현되자, 인류는 더 이상 다양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인류가 단지 희망적인 사람들(언젠가 다가올 미래에 희망을 만날 수 있고 지금부터 속도를 축적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들, 그래서 가능성, 즉 계획·의사결정 무한함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 :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과 열등한 기술적 운송장치 때문에 유한한 세계에서 근근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만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8️⃣ p.150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탕카멘이 양손을 겹쳐서 가슴팍에 포개고 있는 이미지를 잘 알고 있다. 한 손에는 채찍, 또 한 손에는 갈고리를 쥔 모습을 말이다. 채찍은 전차를 가속할 때 사용되며, 갈고리는 전차의 속도를 늦출 때, 즉 고삐를 당기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파라오의 권력도 [속도의] 억제, 제동, 지식, 가속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정치』). 9️⃣ p.224 "[.....] 간단히 말하자면, 반복적으로 적군에게 가할 수 있도록 고안된 시간과 공간상의 통일적 계획, 즉 전쟁의 수행 가능성을 낳은 것은 도구[무기]가 아니라, 역사라는 전체주의적 언어다. 이 언어는 해외나 자국에서 전쟁의 절대적인 본질(즉 속도)을 추구했던 유럽 국가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세계의 상호 협력이 낳은 산물인 바, 그 결과 이 언어는 서구의 군사적 지식을 통해서 세계 역사를 절대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따라서 순수한 역사란 지형에 대한 순수한 전략적 진격을 다른 말로 옮긴 것일 뿐이다. 이 전략적 진격의 힘은 [적군보다] 먼저 수행된다는 데 있으며, [전황(戰況)에] 결정적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역사가는 시간의 전쟁을 이끄는 수장일 뿐이다."* * Paul Virilio, "La guerre pure", Critique, n°31, Octobre 1975 🔟 p.253 민주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나누는 것이다. 무엇을 나누는가? 의사결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사회에서는 의사결정이 놀랄 만큼 짧은 시간의 한계 속에서 이뤄진다. 운송수단과 전송 수단의 혁명이 민주적인 통제를 넘어서는 속도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계적 습격과 더불어 등장한) 상대적 속도 대신에 (핵무기의 등장과 더불어 등장한) 절대적 속도가 사용됨으로써 민주주의의 본질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비릴리오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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