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노스탤지어는 유토피아를 대신할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현대사회의 종합 진단서!
현대성 이론의 대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운 시대
다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바우만의 마지막 성찰과 통찰
난민 문제, 경제적 격차, 인종차별, 정치에 대한 불신,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 등은 우리 사회가 세계와 함께 앓고 있는 병이다. 『레트로토피아』는 모두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 버린 현장에서, 두 차례의 전체주의를 온몸으로 겪어낸 노학자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띄우는 희망의 편지다.
자유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라는 토대 위에 오늘날 우리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얻은 것만 같다. 하지만 인류가 혁명을 통해 쟁취한 이 자유는 우리 각자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워줬다. 자유를 떼어서 양도한 대가로 국가권력이 보장했던 신체적 안전과 경제적 안정, 심지어는 행복까지도 모든 책임은 이제 우리 각자가 져야 한다.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은 우리를 더 편하고 자유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기대했던 인터넷 기술과 미디어의 발전이었다. SNS를 통해 매일 중계되는 다른 사람들의 '더 행복한 모습'은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고, 음모론과 가짜뉴스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가 원하던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이제 아무것도 없는 원초적인 세계,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고만 싶다. 바우만이 진단한 현대의 모습이다.
폭력을 조장하고 공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인가, 그들인가?
과연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성공했을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홉스는 강력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런 국가권력의 등장으로 우리는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성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근데 정말 그럴까? 최근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폭력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 폭력은 전혀 우리 사회에서 축출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군수산업의 지속적인 성장, 소형 총기 거래에 대한 국가의 방관을 보면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국가가 폭력과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들어 폭력이 더 자주, 더 크게 인지되는 데에는 미디어의 영향도 있다. 폭력은 늘 잘 팔리는 뉴스기 때문이다. 발달한 인터넷 미디어 환경은 그야말로 폭력을 여기저기 전시하기에 적당했다. 하지만 미디어 자체가 진짜 원인은 아니었다. 진짜 원인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좌절된 사람들의 분노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폭력 말고는 자기 목소리를 낼 다른 수단이 없는 약자들이 매일 새로 생겨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국가권력이 묵인한 무기들을 활용해 사회가 무가치하다고 내팽개친 자신의 삶을 ‘자살폭탄테러’와 ‘무차별 살인’ 같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사용한다.
오늘날 자행되는 폭력의 무서운 점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때문에 폭력에 대한 공포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에게로 스며든다. 다음은 내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모두에게 엄습한다. 이 공포와 불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분노하는 약자들을 더 혐오하게 만든다.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가난하고 무능한 이방인들에 눈을 흘기게 되는 것은, 거기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비극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소비사회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순간 저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모습이 될 것이란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이 폭력적으로 보이는 이방인들에게 맞서기 위해 서로 똘똘 뭉쳐야 할 것 같다. 미래로 나아가는 진보의 길은 이제 희망에 찬 길이라기보다 지금 가진 수준의 안정과 지위도 빼앗길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다. 하지만 미래와는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고 아늑하다. 가끔 불만스럽긴 하지만 뭐 지금까지처럼 참을 만하다. 이렇게 미래로 나아가는 길에 지친 사람들이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 할 동안 정치 세력들은 과거를 조금씩 자기 편한 대로 바꾸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인 역사는 없고,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이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과 권력의 이익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제 트럼프 지지자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전통적인 가치가 차별적이더라도, 그게 더 낫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특질인 것처럼 포장되거나,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옹호된다. 아무리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국경을 봉쇄해도 의미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소리 높여 말해도, 실상이 어떻든,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을 믿는 게 편하다. 그렇게 오늘날의 들불처럼 민족주의가 번지고 있는 상황을 바우만은 ‘회귀’의 흐름으로 분석한다.
민족주의를 근거로 외국인을 적으로 돌리는 정치적 전략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민족국가의 다른 정치적 자주권의 요건들인 군사, 경제, 문화가 각각 금융과 무역, 정보화라는 물살에 씻겨 내려가 버리자 남아 있는 유일한 전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 이주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금의 강대국에서부터 신대륙으로 이주했다면, 이제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삶을 개선할 유일한 기회들이 모두 아주 소수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이민자들이 신대륙의 개척자들처럼 대단한 야망과 야망을 실현할 무기들을 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이 이민자들의 희망이란 근근이 이어가는 삶, 그뿐이다. 반대로 무기로 가득한 곳은 과거 식민지 개척자들이 점령했던, 과거의 그 신대륙들이다. 여기서는 매일 종교, 정치적인 내전과 갈등이 일어나고, 더 많은 사람이 매일 실향민이 된다. 대표적인 지역은 중동 지역이지만, 중동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젊은이들의 시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뿐 아니라 기분부전장까지도 이제 더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발전과 개선에 허락된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은 노년층보다도 더 많은 수의 청년 세대가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초등학생 사이에 전파됐던 ‘자살 송’에 대한 논란은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바우만은 이런 현상들을 ‘자궁으로의 회귀’로 진단했다.
소비사회는 사람들 모두를 잠재적 경쟁상대로 만들어버렸다. 계속되는 경쟁 때문에 한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이들도 좌절감에 압도됐고, 이제 내일이 앞으로 가는 길이든, 뒤로 가는 길이든 신경 쓰지도 않는다. 대신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감당 못 할 무력감을 지워내려고 한다. 그저 자신의 작은 행복만이 지상과제인, 자본주의가 키우고 단련시킨 이 나르시시스트들을 사회는 골칫거리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을 ‘성격 장애’로 진단해야 할지, ‘사회 장애’로 진단해야 할지 헷갈린다. 아니면 아예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정상 상태’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어쨌든 바우만은 이들의 예후가 ‘불안’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에 동의한다. 내 삶을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압박감, 원하는 일을 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요에서 오는 불안 말이다. 지금 청년들은 평생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도록 훈련됐다. 그렇게 계속 자신에게 함몰되도록 강권 받았다. 행복과 건강, 자기계발까지도 의무로 짊어진 청년들은 역사상 가장 우울한 세대가 되었다. 가장 많이 정신의학과를 찾고, 항우울제를 먹는다. 자기계발서들은 이런 현상을 가장 영리하게 이용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면 남도 사랑할 수 없다든지, 혼자서 가고 싶었던 식당에 가 밥을 먹는 일은 용감함의 증거라든지 하는 조언을 건넨다. 그리고 더 많은 정신과 상담과 약을 통해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라고 권한다. 혹은 선을 넘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을 가이드를 제공하거나, 이미 선을 넘은 이기주의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