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목욕·수집·음식·와인·섹스·그리고 잔혹성.
쾌락의 절정에 빠졌던 로마 100년의 기록
쾌락의 역사로 본 로마제국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에서 꽃피웠던 쾌락의 문화는 방대한 영토와 그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야만인들과 구분되는 문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뜨거운 분출이었다. 로마의 두 영웅,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일찍이 씨를 뿌리고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싹을 틔워 후대 황제들에 이르러 흐드러지게 피어난 쾌락의 문화는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퍼졌다. 쾌락의 선봉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황제들이었다. 일찍이 인간이 근접하지 못했던 갖가지 쾌락을 향유하던 1세기 로마인들의 유산은 하나의 사고방식 혹은 문화 현상으로 남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마저 유혹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효용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쾌락이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찬란했던 로마제국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
2천 년 전, 로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방대한 영토의 지배자인 황제, 토가를 차려입은 귀족들과 검투시합을 보며 열광하는 시민들, 대리석으로 지은 목욕탕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대화와 거침없는 섹스, 그리고 반란을 꿈꾸는 노예와 검투사……. 고대 로마는 오늘날까지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다. 역사상 그토록 지배적이고,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폭력과 성이 난무했던 시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후대인들은 그런 로마의 ‘방탕’을 은근히 부러워하면서 제멋대로 상상하길 즐기고 그런 상상은 네로와 칼리굴라 같은 비이성적인 황제나 잔혹한 검투사들의 세계를 다룬 ‘19금’ 영화를 쏟아낸다. 우리가 보아왔던 것이 사실일까?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 수도 있다. 1세기 로마 사회가 열정적으로 쾌락을 추구했던 것은 드넓은 세상의 지배자 혹은 세련된 문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한 방식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 쾌락을 추구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황제들이었다.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사실상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자리로, 그들의 쾌락 추구에는 그 어떤 선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남의 아내를 취하고 수많은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네로나 칼리굴라 같은 황제들은 역사에 ‘악의 화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조차 쾌락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황제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황후 리비아는 원래 남의 아내였던 것을 빼앗은 것이며 나이 들어서까지 수많은 처녀들을 줄줄이 침실로 불러들였다. 황제를 위해 처녀들을 간택하는 일은 리비아 황후가 손수 맡았다. 현명하고 후덕한 황제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은 아우구스투스조차 개인적인 쾌락을 양보하지 않았으니 다른 황제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회적인 쾌락의 추구는 먼저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로마 전역에 대규모 건축물과 위락시설을 조성하였는데 거기에 들어간 돈은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카이사르의 후예인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는 데 더욱 공을 들였으며 후대 황제들은 자신의 위상과 치적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건축물을 선택하였다. 제국의 수도 로마의 모습은 당시에 이미 세계 도시로서의 위용을 뽐냈으며 판테온과 콜로세움을 비롯한 경이로운 건축물들의 유적은 오늘날까지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인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도시 건축의 열풍은 귀족들의 빌라와 정원으로 그대로 옮겨져 오늘날 발견되는 고대 로마의 빌라들은 현대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빌라에서 발견되는 각종 프레스코 벽화와 모자이크화, 그리고 조각 작품들은 이탈리아와 유럽 각국의 박물관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이다.
이제 입이 즐거울 차례이다. 영화에서 자주 보아 우리에게 익숙한 로마의 만찬은 산해진미와 와인을 곁들인 하나의 거대한 행사로 주인과 식객들은 평상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식사를 즐겼다. 수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 차례차례 음식을 들여오는 로마의 만찬은 오늘날의 그 어떤 최고급 코스요리와도 비교되지 않는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로마인들의 와인 사랑은 너무나 극진하여 오늘날 발굴되는 거의 모든 유적지의 지하에는 와인 저장고가 있으며 와인을 담는 술병인 암포라가 무더기로 나오곤 한다.
로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얀 수증기로 덮인 목욕탕이다. 로마의 목욕 문화는 가장 빨리 제국의 구석구석으로 전파된 로마 문화였다. 로마가 점령했던 브리튼, 리비아, 예루살렘, 터키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고대 로마의 목욕시설이 발견된다. 대단히 대규모로 화려하게 또 과학적으로 설계된 목욕탕은 오늘날과 같은 냉탕과 열탕, 사우나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목욕이야말로 그들을 야만인과 구분시키는 가장 문화인다운 습관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성(性)문화는 오늘날까지 호기심의 대상이며 끊임없는 이야기를 자아내는 주제이다. 노골적이고 질펀한 성애 장면 그림, 각종 욕설과 문구로 뒤덮인 폼페이 사창가 유적지는 최근까지 여성 관광객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그들의 성 문화 가운데 하나는 남색(男色)으로 이는 오늘날 말하는 동성애와는 다르다. 로마의 성인 남자들은 십대 소년들을 섹스 파트너로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주로 노예 소년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카이사르조차도 십대에 이런 경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매우 지배적인 성 문화였으며, 더욱 기이한 것은 이런 장면들을 유리병이나 청동컵에 새겨 넣어 집안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워런 컵’에는 한 성인 남자와 소년의 성애 장면이 새겨져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와 최근의 인기를 끌었던 <스파르타쿠스>에서 보듯이 로마의 잔혹성과 폭력성은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쩌면 영화에 그려진 것들은 실제에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들의 시합은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였으며 콜로세움과 같은 거대 경기장에서는 고대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공연도 펼쳐졌다. 물론 그 신화에서는 반드시 누군가 죽게 되어 있었고 때로는 맹수들이 등장하여 관람객들이 보는 앞에서 잔혹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기원후 80년 콜로세움 개관일에 목숨을 걸고 싸운 검투사들의 수는 무려 3천 명에 달했다. 로마인들의 잔혹성은 노예들에 대한 기록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끊이지 않았으며 가장 가혹한 것은 목숨을 끊어버리는 십자가형이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당시 십자가형을 대행하는 대행업자들이 성행했을 정도였다. 손님들 앞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한 노예를 칠성장어 양식장에 던져 넣으라고 했던 귀족의 이야기가 전해지며, 로마 시 지사였던 세쿤두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범인을 찾지 못하자 그 집안의 노예 400명이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쾌락의 경제적 효과
오늘날의 럭셔리 소비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고급 소비가 전체 소비 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1세기 로마의 쾌락문화는 그 자체로 지대한 경제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우선 대규모의 건축 공사는 수많은 신축 공법과 건축기술의 발달을 낳았고 인력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런 건축 공사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또한 풍부한 물산과 대규모의 거래는 통화 경제의 새로운 큰 변동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8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 1세기 로마 시대만큼 인류가 자원을 대규모로 소비한 적은 없었다. 로마 제국은 유럽과 지중해 전역의 광산에서 금·은·동·납·아연을 대규모로 채굴하였으며 이를 제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기오염 정도는 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