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의 경주용 헬멧 /셔츠에 낙서를 하지 않겠니 /밤이 날마다 찾아와 /물류창고 /풀 뽑기 /물류창고 /이디야 커피 /물류창고 /이렇게 /물류창고 /최근에 나는 /물류창고 /통영 /물류창고 /저속한 잠 /물류창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은 해였다 /물류창고 /여름에 우리는 /물류창고 /항상 새것 같은 /칩 /휴가 /물류창고
II
너는 묻는다 /조가비에 대고 /녹지 않는 사람 /안부 기계 /연립주택 /노면의 발달 /투숙 /오늘의 경기 /다음 뉴스 /원주율 /티베트여서 그래 /머릿속의 거미 /개가 나타나는 순간 /시멘트가 좋다 /봄 소풍 /하양 위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계속
III
오늘의 미세먼지 /주민 센터 /이불 /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비를 위해서 /신분당선 /흥미로운 일 /덤불 가운데 식탁보 /나의 중얼거리 는 사람 /토마토수프 /편의점 /걸어가던 개 /우리를 제외하고
해설
‘끝없는 끝’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조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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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시 쓰기
한국 시의 관행에 반하는 이수명의 끝없는 실험!
감정을 덧입혀 대상을 왜곡하는 화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대상을 중심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언어의 발견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이수명이 일곱번째 시집 『물류창고』(문학과지성사, 2018)를 출간했다. 『마치』 이후 4년 만의 시집이다. 이수명은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래 일곱 권의 시집과 다수의 시론집, 평론집 들을 출간하며 현대시에 관한 깊은 연구를 기반으로 시단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으로 총 열 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특별한 구분 없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물류창고」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그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하는지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무한히 반복하는 공간으로서의 물류창고를 보여줌으로써, 시인은 ‘무효’로 수렴하는 시적 언술을 향해 전진하는 말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시적 공간
시 「물류창고」 열 편은 제목만으로는 서로를 구별할 수 없도록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들이 연작시가 아니고 그저 ‘물류창고’라는 시로서 흩어져 있는 별개의 작품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물류창고일까, 대체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물류창고’는 일반적으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며, 상품을 빼고 넣을 때에만 열린다. 물류창고라는 공간의 안팎에는 보관되고 운반되는 대상이 있으며, 그를 수행하는 주체, 그리고 운반 혹은 보관 등의 행위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물류창고들 간에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볼 수 있고, 언젠가 분명 한 번쯤은 보았지만 그렇다고 물류창고를 특별히 의식하게 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 사이의 개별성을 인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
무얼 끌어 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류창고」(pp. 14~15) 부분
어디에나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인식되기 어려운 곳, 이수명의 물류창고에서 우리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분명 누군가가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마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담당자처럼” 돌아다니며,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담당자면 담당자고, 일을 하면 하는 것일 텐데, ‘~처럼’ 보인다는 시인의 언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들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돌아오곤” 하며, 어떤 행위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데까지 끝내 다다르지 못한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물류창고』 속 시 세계에는 “‘끝없는 끝에서in fine sine fine’ 오고가기를 반복하거나 그마저 왔다 갔다, 그저 따라 하는 주체가 있을 뿐”이라며, “새로운 행위는 실행되지 않는다”는 지점에 주목한다. 특히 시인은 「물류창고」 열 편과 그 외의 시들을 교차로 배치시키는 동시에, 무한한 행위가 반복되는 공간으로서의 물류창고 역시 반복되도록 위치시킴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증폭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기 어려울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런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 “글쎄 모르겠어”
의미를 갖기 힘든 행위의 무한한 반복
그는 묻는다 뭘 모르는 거지
나는 말한다 창고 안을 돌아다니면
뭘 하려 했는지 자꾸 잊어버려
저쪽으로 갔다가 글쎄 모르겠어 그냥 돌아오게 돼
―「물류창고」(pp. 32~33)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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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말만 나온다.
―「흥미로운 일」 부분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자기 안에서 답을 찾기 어려울 때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참고한다. 이 시집 안에서도 역시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참고할 페이지를 펼치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참고 페이지 역시 몹시 수상하다. 표시할 수 없는 페이지가 등장해서 다시 앞으로 넘기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말만”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는 다시 “표시할 수 없는 페이지”가 나옴으로써, 사실상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채로 무한히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는 동작만이 남는다.
결국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라는 질문 앞에서 화자는 “글쎄 모르겠어”라고 답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확인하는 데 이른다. 무한히 반복되는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고도 그 행동을 계속하는 것 외에 달리 뭔가 할 것도 없는 상태 속에 이 시집은 놓여 있다.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효로 수렴되는 행위를 엿볼 뿐이다. 영원히 무효의 지점에 도달하는 곳이 바로 이수명의 물류창고들이다. “‘나아갈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주체-대상-행위의 무효를 무한히 방출하는 고유한 문장들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는 ‘오늘’을 활활 태운다”(문학평론가 조재룡).






상맹
5.0
끝내준다 시도 평론도. 뭐랄까 우리 시대의 비극은 말 그대로 결정화되지 않는 지점, 무효화되는 지점에서 오는 것 같다.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자극을 자극으로 지우면서 열심히 사는데 그냥 계속 그렇게 반복하고 중얼거리면서 결정화되지가 않는다. 아무리 의미를 주형하고 노동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도 그게 일순간에 다 의미가 사라지는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이름붙이는 행위는 의미를 규정하고 한정짓는 것에 있는데 우리의 이름 붙이는 행위는 비결정성을 더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명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행위와 문장은 연립되면서 무언가를 발생시킨다. 좋게 말하면 잠세태로서 의미의 여집합의 삶이랄까. 내가 쓰고 싶은 시의 형태, 즉 일상에서 상상을 덧붙이면서 모호하게 두는 형태여서 너무 부럽고 질투나는 것도 있지만, 그 흔한 현대사회비판을 단순히 서울과 자본주의 노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서 경탄할 뿐이다. 중기 홍상수가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의미의 해체를 말하는 것처럼, 이수명 시인도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무력함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지 않음의 무력함도 아닌 반복된 함의 무력함. 일본 서브컬쳐에서 이미 제기되었던 하루히로 대표되는 루프물 속에서의 어떤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의 연장선으로도 보인다. 의미의 비결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하는가. 하루히처럼 그냥 그 자체로 긍정해버릴 것인가, 에반게리온처럼 태어났으면 이왕 사는 거 열심히 사는거야 식의 일본식 결론을 내려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건담과 공각기동대처럼 과거 혁명식의 총체적인 변화를 말해야하는 것인가. 답은 역시 비결정화되어있고 모든 답도 무효화된다. 이 사유조차도. 다만 그냥 쓰고 의미화하고 의심하고 바라보고 다시 무효화될 뿐.
cb
5.0
일상의 무일상성 또는 무일상의 일상성을 상기시키는 공포의 시였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시가 무섭다. 동시에 좋다.
Luckty_
3.0
‘ 네가 안부를 묻는다. 안부는 나를 아프게 하고 안부는 나의 살갗을 파고들고 살갗은 너무 캄캄해 나는 캄캄한 살갗을 여기저기에 걸어둔다. 들판 여기저기에 ‘ / 안부기계
db
4.5
나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저녁이면 걸음을 옮겼고 사람들이 다 같이 옮기는 걸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걸어갔고 그들은 그냥 걸음과 하나가 되어서 걸음 자체여서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는데
보영
3.0
'앞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말만 나온다.'
ii
5.0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이토록 생산적이고 기계적이면서도 무심하게 팔다리를 뒤흔드는지, 살자고, 살자고 움직이는지.
⠀ ⠀
5.0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야 이미 깨어 있어서 언제나 깨어 있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 아무도 나를 깨우지 못해 이윽고 환해서 아주 많이 환해져서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틀려 버릴 거야
소예🎗
3.0
드물게도 시의 해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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