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손정목 · Social Science
368p
Where to buy
Rate
5.0
Average Rating
(2)
200자 원고지 7,200매 분량의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에 대한 증언이다. 격동의 서울 50년을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재조명하여 오늘날의 도시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1970년대 서울특별시 공무원(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을 지냄)으로 일한 바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난무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배경, 즉 도시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입안되고, 수정되고, 시행되는 과정과 뒷이야기를 엮었다. 서울시 최초의 도시계획 수립에서 최근 수서사건의 전말까지 신문, 국회속기록, 용역보고서, 재판소판결문 등의 자세한 자료 인용을 통한 고증과 관련인물에 대한 얘기, 비사까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영화제 개최]

단, 5일 간 인천에서 만나요!

디아스포라영화제 · AD

[디아스포라영화제 개최]

단, 5일 간 인천에서 만나요!

디아스포라영화제 · AD

Author/Translator

Table of Contents

능동 골프장이 어린이대공원으로 1.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 2. 골프장을 옮기라는 대통령 지시 3. 온 국민의 성원을 담아 완공 4. 어린이대공원 건설이 주변지역에 미친 효과 경부고속도로 준공으로 시작된 강남개발 1. 제3한강교의 가설 2. 경부고속도로와 자동차시대 개막 3.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권력층의 강남 토지투기 4. 영동제2지구 개발계획 발표와 땅값 상승 5. 말죽거리 신화-땅값 앙등 6. 강남시가지 형성을 촉진시킨 요인들 잠실개발과 잠실종합운동장 건립 1. 잠실 공유수면 매립공사 2. 입체적인 도시설계에 의한 구획정리사업 3. 잠실 아파트단지 계획 4. 세계수준의 잠실종합운동장 건설 3핵도시 구상과 인구분산정책 1. 다핵도시 구상 2. 지하철순환선(2호선) 건설 3. 고속버스터미널의 입지 4. 영동아파트지구 건설과 아파트재벌의 영락 5. 인구억제계획 시안의 전말 6. 강북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과 8학군 형성 7. 3핵도시는 이루어진 것인가

Description

한국전쟁 이후 현재의 모습이 있기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에 대한 증언 7년간 200자 원고지 7,200매 서울시의 공간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66년부터 1980년까지의 15년간이었는데, 지은이는 격변하는 시기의 한가운데-1970년부터 1977년까지-서울시에서 도시계획국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난무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배경, 즉 도시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입안되고, 수정되고, 시행되는 과정과 뒷이야기를 엮었다. 서울시 최초의 도시계획 수립에서 최근 수서사건의 전말까지 신문, 국회속기록, 용역보고서, 재판소판결문 등의 자세한 자료 인용을 통한 고증과 관련인물에 대한 얘기, 비사까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불쾌해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저자는 오직 귀중한 역사이기 때문에 충실하게 후세에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써내려갔다. 7년간 23꼭지, 200자 원고지 7,200여 매의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하면서 작업 막바지에 위암 수술도 한 차례 받았고, 교통사고도 있었다. 23꼭지 중 19꼭지는 국토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월간≪국토≫에 1996년 5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연재했던 내용이다. 군살을 뺀다고 했는데도 방대한 분량이다. 서울시나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부처에서처럼,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은 역사의 충실한 전달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내용 소개 도쿄의 도시계획 120년의 역사를 ‘바람기가 전혀 없는 날의 남해바다’로 비유한다면 서울의 도시계획은 ‘태풍을 맞은 부산 앞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격동의 서울 50년을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재조명하여 오늘날의 도시 구조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증 유발과 함께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 내용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한국전쟁과 서울의 피해 서울에서만 9만 5천 명 이상 사망·학살·납치·행방불명되었다. 보통의 사망이 2만 9,628명, 학살이 8,800명, 납치가 2만 73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일반주택의 피해 연건평 182만 358평, 서울시청 청사는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내부는 거의 파괴 소실되었고, 당시 9개 구청 중 3개 구청은 본관이 완전 파괴, 나머지는 모두 반소파, 277개 동사무소 중 62개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나머지 215개는 모두 반소파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인적 피해와 함께 중요한 문화재의 피해를 눈앞에 두고 있던 서울은 주일대표부 김용주 공사의 노력으로 그나마 문화재의 폭격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워커힐 건설-군사정권 4대 의혹사건의 하나 1961년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과 김종필 정보부장의 대화를 발단으로 미군장병 3만 명의 휴가 유치를 위해 건설된 워커힐. 사단법인 워커힐이 60억 환으로 출발하여 1962년 1월 5일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나 토목공사는 그보다 앞서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4대 의혹사건 국회 감사로 1961년 9월부터 1962년 2월까지 각 군 공병감 휘하 각종 장비를 동원하고 연인원 2만 4,078명을 무상노역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가 워커힐 건설 비용과 관련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모두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19만 평의 부지 중 사유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그 매수대금은 얼마였던가, 국유지·시유지는 자동적으로 워커힐 소유로 전환되었는가. 둘째 건축위원 및 기타 자문위원·고문 등에 대한 사례는 어떻게 얼마나 지급되었던가. 셋째 삼환·대림·동아 등의 건설회사와는 어떤 조건으로 시공계약이 이루어졌던가. 군장병의 노임은 무상이었겠지만 이들 시공업체가 어느 부분까지 자체 노동력을 동원했던가. 넷째 개관준비 요원 다수를 일본에 파견, 사전교육시켰는데 그 비용도 6억 4천만 원 중에 포함되었던가. 박흥식의 남서울 신도시계획안 전말 화신백화점, 그 후신 신신백화점 등 유통업으로 이 나라 최고의 부를 축적한 박흥식이 신도시계획을 처음 구상한 때는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나던 1935년 봄이었다. 일제하에서 불광-수색 도시계획안을 수립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서, 육군 소장 이주일이 “수도 서울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계획을 구상해보라”는 과제를 하나 주었는데 그것이 후일 「남서울 도시계획사업 인가신청서」가 되었다. 새서울 백지계획, 도시기본계획과 8·15전시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불쑥 “인구 150만 명을 수용하는 새 행정수도를 만들어내겠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시장으로 부임한 지 약 50일이 지난 1966년 5월 27일이었다. 김 시장은 8월 15일을 기해서 도시계획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마련해야 할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과 도시기본계획이었다. ‘4천만 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인구 100만 내지 150만 명 규모, 그리고 도시의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해달라’는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의 작업 조건이었다. 이 그림의 작가는 1992년인가 93년에 밝혀졌는데 바로 저자와 허물없이 지내던 박병주였다. 그는 이 그림이 당시 엄청난 언론의 비판을 받아 부끄러움이 앞서 비밀에 부쳤다고 회술했다. 또한 도시기본계획안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고무풍선”이니 “기술·과학성은 전혀 생각도 않고 세워졌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저자는 그것이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둘째 이 계획에서 처음으로 도심부재개발이니 고도지구·미관지구니 하는 개념이 도입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점, 셋째는 불완전하나마 20년 장기계획이라는 것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을 평가한다. 아 세운상가여! 전쟁 때 소이탄의 투하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공터, 속칭 ‘소개도로’라 불렸던 길게 뻗은 빈터에 세운상가라는 기막힌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소개도로 조성 당시 조선총독부가 그에 저촉된 토지·건물 보상비를 경성부 예산에서 지급하였다. 그 토지소유권은 당연히 경성부 즉 서울특별시에 있어야 했으나 일본인 소유토지의 등기를 경성부로 고치기 이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광복을 맞았다. 이 종묘 앞-필동 간 50m 광로의 절반을 재무부 관재국은 민간인에게 불하해버렸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종삼’이라 불리는 나라 안 최대규모의 사창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일대 무허가 판잣집촌을 본 중구청 6급주사 이을삼 계장의 행정연구서 「대한극장 앞­ 청계천 4가 간 계획도로 정비방안」을 본 김현옥 시장은 과히 불도저라 할 만한 추진력으로 이 일대 무허가건물을 철거하고, 중앙도시계획위원회의 반대에도 재개발지구로 지정하고 ‘세운상가’라 통칭하게 된 8개의 대형건물이 만들어내게 되는데... 여의도 건설과 시가지가 형성되는 과정 세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의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20년 5월 로마를 출발하여 도쿄로 가던 2대의 이탈리아 공군 비행기가 로마를 떠난 지 104일 만에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면서다. 그리고 1922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방문비행하면서 여의도의 군용비행장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당시 여의도의 중심부를 대부분 공군이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외는 대개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66년 서울에 큰 홍수가 나면서, 그해 부임한 김현옥 시장에게는 하수도 정비는 등한시하고 도로 만들기에만 광분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그해에 김 시장이 몰두하던 일은 세운상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 등 민자유치에 의한 재개발계획이었으므로 한강정비는 뒷전이었다. 그러다가 67년 제1한강교 남단에서 영등포 입구까지의 제방도로가 모습을 갖추어갈 무렵 김 시장은 강변도로 북쪽의 여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 섬을 개발하면 엄청난 넓이의 택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