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이 함께 쓴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London and New York: Verso, 2000)를 완역한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1990)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해 젠더, 성차, 동성애 등의 주제에 대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후後구조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자다. 라클라우는 샹탈 무페와 공동으로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1985)을 통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개척한 대표적인 정치이론가다.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언어학을 접목함으로써 기존의 경제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정치이론을 비판하고 헤게모니 개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저항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지젝은 정신분석, 헤겔 철학, 마르크스주의의 이론들을 결합함으로써 철학과 정치, 문화 등을 넘나드는 다양한 지적 분야에서 논쟁적이고도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있는 오늘날의 대표적 사상가다.
(이하, <우연성>)은 서로 다른 이론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명의 저자들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좌파 정치에 필요한 사유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전개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담고 있다. 책은 각 저자들이 상대방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을 기초로 진행되며, 상대를 비판하고 상대의 비판에 대응하는 저자별 3편의 글, 총 9편의 글을 담고 있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 중 하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좌파적 사유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된 우연성과 특수성을 보편성의 견지에서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고되었던 필연성/보편성 대對 우연성/특수성의 이분법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우연성과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어떻게 보편성이 창출될 수 있는지를 각자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고찰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우연성과 보편성은 대립인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모색되어야 할 개념들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세공되었으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어낸 헤게모니 개념은 본질주의적 사유와의 대립 속에서가 아니라 우연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지형 속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특수성과 차이, 우연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론과 실천의 일면적 흐름 속에서 보편성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시도, 보편성의 견지에서 그것이 특수성/우연성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우연성> 내에서 진행된 대화와 논쟁의 구체적 세부에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고유한 ‘현재적’ 의의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세 저자들이 제시하는 사유의 방향들 속에는 쉽게 화해될 수 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다. 우선 버틀러를 중심으로 한 역사성의 쟁점이 있다. 버틀러는 성적 정체성을 비롯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체성이 우연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하며, 재再의미화와 수행성의 실천을 통한 전복적 주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다른 두 저자들은 역사적인 것의 가능성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혁신의 가능성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라클라우를 중심으로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라는 쟁점이 있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은 보편자와 특수자의 불가피한 간극을 설정하며, 양자를 ‘접합’의 개념을 통해 결합시킨다. 하지만 버틀러와 지젝은 보편자와 특수자의 불가분성이라는 헤겔적 노선을 견지하면서 특수자 자체가 갖고 있는 보편성의 정치적 함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지젝이 제시하는 라캉의 실재 개념을 중심으로 한 쟁점이 있다. 지젝은 실재 개념을 통해 역사성-보편성을 넘어서는 역사성-보편성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부정성의 힘을 세공하고 있으며, 여기서 현존하는 질서의 근본적 재再구조화의 함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런 실재 개념에서 성적 정체성의 변화를 제약하는 선험적 근거를 인식하며, 라클라우는 계급/자본을 논의하는 맥락에서 라캉적 실재가 새로운 판본의 토대/상부구조 모델로 기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논쟁적 지형 하에서 저자들은 각자의 정치적 실천을 세공한다. 버틀러는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특수한 맥락과 결합되어 있는 보편자들을 인식하며, 그런 보편자들의 경쟁 속에서 문화적 번역의 개념을 제시한다. 라클라우는 역사적인 것의 지평으로 기능하는 보편자를 식별하며, 보편자와 특수자의 접합 속에서 민주적 등가 연쇄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실천을 제안한다. 반면 지젝은 라캉적 실재와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결합시키면서 근본적인 정치의 가능성으로 라캉적 행위의 개념을 세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가능한 세 개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선택지를 규정하는 개념들이 이미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위협받는 긴장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완성된 정치적 선택지를 전시하는 장이 아니라 세 저자들이 제시하는 사유 속에 어떤 적대와 긴장이 흐르고 있는가를 드러냄으로써 좌파의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사유의 최전선에 무엇이 걸려 있는가를 첨예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