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습지생태보고서>로 단숨에 한국 만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자리잡은 만화가 최규석이 최신작 <대한민국 원주민>(이하 <원주민>)을 내놓았다. <원주민>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을 직접 취재하여 쓰고 그린 자전적 이야기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60년을 소리 없이 그러나 건강하게 통과해온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역사에 비추어 담담하게 추적하는 우리 근현대사에 관한 사려 깊은 기록이다.
‘대한민국 원주민’,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작가의 말을 빌리면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로, 대한민국 60년 역사와 삶의 궤를 같이하나 그 존재감은 극히 미미해서 역사책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기에는 부적합해 보이는 이들을 가리킨다. 일제시대를 거쳐,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고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왔으나 그 의미를 알 겨를도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해야 했던 사람들 말이다. 근대적 의미의 세련된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국민의 자격으로 참여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 작가 최규석은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는 이들을 “묻어두고 그냥 가기에는 서러워” 우리 앞에 새로이 ‘대한민국 원주민’이라 호명하며 불러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들의 삶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에나 살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
<원주민>에 등장하는 가족은 우리나라 가족드라마가 보여주는 화목한 중산층 가족이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씨트콤에 나올 법한 명랑 괴짜가족도 아니다. 오히려 <원주민>의 가족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하고 운을 떼며 이야기하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나 존재할 것만 같다.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어렸을 적부터 공장에서 일했던 누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하려 애쓰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큰형, 5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왔던 엄마, 날마다 술에 취해 가족에게 주사를 부렸던 아버지. 이들이 모여 이룬 가족은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없을 것 같지만 아직도, 여전히 다수를 이루는 가족들의 전형이다. 무턱대고 정의롭고 선한 인물도 없고 무작정 악한 사람도 없다. 과장되거나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아 오히려 더욱 진솔하고 솔깃하다. <원주민>은 때로는 심심한 나물 같기도 하고 때로는 격한 갈등에 휘말리기도 하는, 어느 동네에나 살고 있을 것 같은 가족의 생생한 역사드라마다.
한국사회의 구석진 시간대를 비추다
한편 작가 최규석이 <원주민>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매우 섬세하다. 이제 서른을 갓 넘은 젊은 작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그 속이 꽉 차서 여물었다. 아버지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이나 엄마가 가끔씩 보여주는 갑갑함에 실망하다가도 곧바로 부모 세대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런 소통의 노력이야말로 작품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 힘이다. 작품 전체를 통과하는 세밀한 손길이 우리 역사가 그동안 관심을 기울여오지 못했던 볼품없는 엑스트라들에게도 마음껏 발언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 만화의 젊은 돌풍 최규석, 사실주의 극화의 계보를 잇는다
만화가 최규석은 데뷔 6년째로 오세영, 박흥용, 이희재의 대를 잇는 사실주의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197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상명대학교 만화학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림체와 예민한 감각으로 현실의 이면을 들추는 이야기 구조는 그가 가진 강력한 무기다. 신문과 잡지에 작품을 연재하면서 특유의 블랙유머와 능수능란한 테크닉으로 빠른 기간에 한국의 대표적인 차세대 만화가로 자리잡았다. 작품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로 단번에 마니아군을 형성하며 특히 젊은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003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초청되어 현지 언론에서 ‘탁월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라는 호평을 받았다. 2004년 서울 국제만화애니메이션축제 단편상,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