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시대,
네 곳의 생추어리에서 엿본 서로돌봄의 가능성
반려동물 수의 급속한 성장, 축산업의 대규모 공장화, 야생동물 서식지의 파괴, 종 다양성 파괴, 먹거리의 대량생산 및 유통, 인수공통 감염병의 유행, 도시에 적응한 야생동물 종…… 동물에 관한 논의들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이루어지는 시대다. 국내에서도 보호와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물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들, 야생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동물들에게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보금자리를 제공하려는 생추어리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오늘날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중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구 생태계를 희생시키며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던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인류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적·정서적·기술적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생추어리(sanctuary)는 안식처, 보호구역이라는 뜻이다. 1986년 미국의 동물보호 운동가 진 바우어가 동료들과 함께 ‘가축수용소’ 근처 사체 처리장에서 살아 있는 양 힐다를 구출해 ‘생추어리 농장(Farm Sanctuary)’을 만들었다. 힐다는 생추어리에서 1997년에 자연사했고 그의 묘비에는 “영원히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친구”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생추어리에는 인류의 폭력적인 도구화(사물화)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이 살아간다. 간혹 구조된 야생동물들도 있고 유기된 반려동물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축산업, (의료적·미용적) 실험, 경주 등 오락산업에서 착취당해온 ‘산업동물’들이다. 애초에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조되었기 때문에 야생에서와는 전혀 다른 몸과 경험을 지닌 생명체들이다. 이들은 생추어리에서 인간들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의 착취당하지 않는 삶을 보며 동물이 원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인간이 이들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 느끼고 배운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동물권, 생명, 돌봄이라는 가치의 증인이자 선생인 셈이다.
한국의 첫 생추어리는 2019년 DxE(Direct Actions Everywhere)가 종돈장에서 공개구조한 돼지 새벽이와 함께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총 다섯 곳의 생추어리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 책에는 새벽이생추어리,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화천 곰 보금자리, 제주 곶자왈 말 보호센터 네 곳을 취재하고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2022년 개소한 카라의 미니팜 생추어리는 담지 못했다.) 김다은, 정윤영 작가와 신선영 사진가는 한국에 생추어리들이 생기기 시작한 2019~2020년경부터 관심을 가지고 활동에 참여하다가, 2023년 초 정식으로 기록을 결심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계절이 두 바퀴를 돌며 바뀌는 동안 생추어리에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혹은 평범한 돌봄의 나날들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이 네 곳의 생추어리들은 설립 목표, 운영 주체, 운영 방식이 모두 다르다. 동물을 좋아하는 개인이 시작한 곳(말 생추어리)부터 지역과 협업하며 운영하는 곳(달뜨는 보금자리), 또 수의학적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곳(곰 보금자리), 또 급진적인 슬로건을 걸고 치열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곳까지(새벽이생추어리). 어떤 곳에서는 동물을 ‘명’(이름 名이 아닌 목숨 명命을 쓴다.)으로 세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마리’로 세고, 어떤 곳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일반인들의 방문과 체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선택과 결정과 실행이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각각의 생추어리들은 상황과 자원에 맞춰 저마다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며 만들어가는 모든 자취가, 실패와 성과들이 모두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생추어리들을 마냥 천국처럼 아름다운 곳인 듯 포장하지도 않고 간혹 아슬아슬한 질문들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생추어리에서 느낀 깊은 감동과 설렘이 축소되거나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선영 사진가가 포착한 200여 컷의 장면들은 그런 감동과 설렘을 독자들에게 극대화하여 전달한다.
인제 꽃풀소 달뜨는 보금자리 / 동물해방물결
달뜨는 보금자리는 동해물(동물해방물결)이 운영하는 소 생추어리다. 불법 개 농장에서 개를 구조하다 발견한 소 열다섯 명(이 책에서는 동물을 셀 때 각 생추어리의 원칙을 따랐다.)을 데려오기 위해 농장주에게 구입했다. 이를 위해 동해물은 SNS모금을 시작함과 동시에 소들이 지낼 거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두 달 동안 1648명의 후원자, 46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지만, 춘천에서 울릉도까지 전국을 돌며 찾아 헤맸던 보호처에서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와중에 불법 농장의 처분 시일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급히 소들을 데리고 와야 했다.
또다시 기적처럼 정성헌 이사장의 소개로 인제의 소 농장에 맡기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또 크기가 문제였다. 최대 여섯 마리만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미 열다섯 명의 소들과 얼굴도 익히고 이름도 짓고 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절망했다. 결국 먼저 나오는 순서대로 머위, 메밀, 미나리, 창포, 엉이, 그리고 부들이가 구조되었고, 나머지 소들은 처분 기일에 맞춰 도축장으로 향했다. 이들의 이름은 꽃다지, 달래, 둥글레, 들콩, 박하, 봄동, 백도라지, 겅퀴, 완두다. 활동가들이 들풀과 들꽃에서 따와 강인하게 살아남으라는 마음을 담아 붙인 이름들이었다.
임시보호처의 농장주는 처음에 6개월 예정으로 부탁했던 돌봄을 1년 반 동안 해주었다. 인제 내에서 거처를 찾던 동해물은 신월리에서 마침내 소들의 집을 구했다. 신월리는 로컬 사업의 하나로 폐교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중이었고, 마을 이장, 반장, 사무처장 등 신월리 주민들은 젊은 활동가들과 그들의 비거니즘 운동에 우호적이었다. 이렇게 동해물은 ‘신월리 달뜨는 마을’ 공동체와 협약을 맺어 폐교된 신월분교를 중심으로 ‘비건청년마을’을 만들기로 했다. 열심히 ‘달뜨는 보금자리’를 지으며 입주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 미나리가 죽었다. 활동가들은 소들의 죽음과 삶 사이의 지나치게 가느다란 경계선을 경험하며 이전이라면 (동물권 운동의) ‘적’이라 불렀을 농장주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고 기꺼이 그들에게 배웠다. 이 독특한 협업이야말로 ‘달뜨는 보금자리’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섯 명의 소들이 이사오는 날, 활동가들과 마을 주민들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상태로 이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발 한 발 엉이가 먼저 내딛기 시작하고 뒤따라 다른 소들이 따라내렸다. 머위는 갑자기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좁은 축사에 갇혀 지냈지만 달리는 법을 잊지 않은, 아니 스스로 알고 있었던 이 커다란 산업동물들을 보며 사람들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달뜨는 보금자리의 돌봄활동가들은 가야, 솔, 현욱, 타샤다. 이들은 가족이고 가야와 솔은 어린이다. 현욱은 생태농업(퍼머컬처)를 지향하며 소의 똥을 이용해 풀을 기르고 그 풀을 소와 함께 나누어 먹는다.
어느날 현욱이 자물쇠 채우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머위가 긴 혀로 문고리를 열었다. 고민하던 사이 창포가 먼저 용감하게 문을 나섰다. 그 뒤를 엉이가 따르고, 유순한 모범생 메밀이는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이들을 따라나섰다. CCTV에 고스란히 찍힌 ‘비밀 밤마실 사건’의 전말이다. 소들은 가출을 해서 인근 학교 쓰레기통을 다 뒤집고 도로로 직진해 행진을 한 후 밭으로 가서 새싹들을 맛보았다고 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장님과 현욱을 따라 돌아온 소들은 집의 소중함을 깨닫고 현욱에게 한층 더 다정해졌다. 소들은 이제 다섯 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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