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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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분석, 반페미니즘…. 아렌트의 주장은 20세기 중반 유럽의 문화적·철학적 위기와 결부되는 강력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자유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의 다른 형태라는 주장은 사실인가? ‘공적 공간’의 회복만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여성은 이 공적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가? ‘이론 이후’, 아렌트의 중요성 영국의 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론 이후’로 규정했다. 20세기 후반부를 휩쓴 ‘프랑스 남성’ 사상가들의 이론은 아렌트가 사망할 당시(1975년) 이미 격렬한 도전에 직면한 상태였다. 그리고 21세기 초 전 세계가 직면한 격렬한 변화들은 이 20세기의 주도적 이론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이론들이 적절한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말들인가? 생전에 논쟁적인 유대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친 한나 아렌트는, 오늘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 또는 서사를 제공하는 원천으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이해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이 보인 정치적 태도를 뒤집어엎으며, 정치를 삶의 본질적인 문제로 끌어올린다. 아렌트의 스토리텔링 아렌트는 이야기를 말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이해를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스토리텔링은 특히 이해 가능한 한계 너머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가 된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으로, 아렌트가 서구 문화의 ‘이론’ 개념에서 물려받은 이해의 정태적인 지적 모델과 대조를 이루는 어떤 것이다. 또한 스토리텔링은 문화인류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대로 전통적으로 각 문화가 제 문화에 대한 이해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련의 사건들은 특정 서사 형식 속에 놓임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에 따라 광범위한 청중과 소통하고 공동체에서 기억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이야기들은 말하기 행위에 고유한 공동체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화자, 즉 이야기하는 행위의 주인공과 동시에 그 이야기 뒤에서 판단하고 반응하는 청자 혹은 독자를 포함한다. 아렌트의 정치철학 아렌트의 작업은 몹시 정치적이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의 전체 ‘이론’ 전통이 현실적인 정치적 사유를 크게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그린 정치국가의 청사진이 그랬듯이 철학자들이 정치를 논할 때조차 정치적 영역의 존엄성과 중요성을 부정한다고 말한다. 정치를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처리해야 할 문제 같은 걸로 본다는 것이다. 대화와 설득, 타인들의 주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 등을 포함하는 정치를 대부분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성가시고 불명료하며 인간적인 문제로 여긴다. 정치는 철학적 사유에 필요한 조용한 공간을 공적 영역의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어지럽힌다. 공적 영역에서 고독한 명상과 추상화로 물러앉은 철학 경향은 정치적 위기의 시대에 철학자들을 불운한 삶으로 이끌어갔다.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아렌트는 이 사건, 하이데거가 보여 준 거대한 철학적 가능성과 그가 초기에 나치 정권의 본질을 통찰하지 못했다는 ‘실패’ 사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같은 모순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문화적 영향들을 규명하고자 애썼다. 전체주의와 아렌트 아렌트의 생애는 지난 세기의 첫 75년에 걸쳐져 있고, 그녀가 벌인 필생의 작업과 그녀가 겪은 경험의 중심에는 전체주의적 지배가 유럽에 불러일으킨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아렌트가 1933~1945년의 독일, 그리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겪은 경험들은 전례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체계적 범주화, 달리 말해 기존의 정치적 범주 속에 포섭하는 식으로 이해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는 사건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지배를 전제정치라고 하는 고전적 정치 개념에 끼워 맞춰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전체주의라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유례없는 것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여겼다. 이 전체주의적 체제의 근본적 새로움은 기존의 이론적·철학적 체계로는 그것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악의 평범성 ‘악惡’은 가장 지속적으로 과잉 해석되고 오해받아 온 아렌트 사상의 한 영역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은 1963년 아렌트가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왔다. 이 책의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였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 납치되어 이스라엘 법정에 세워진 나치 전범이다. 출간 당시 아렌트는 피상적인 ‘악의 평범성’이란 구절을 내세워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고 했다며 비난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평범성’이란 말로 아이히만의 책임을 면제해 준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렌트는 근대 전체주의의 악을 표면적 현상으로 본다. 근대 세계에서 악은 인간의 내적 혹은 타고난 충동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화되고 비인격화되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가 끔찍하게 여긴 것이 바로 악의 이 평범성이다. 그녀가 말하려 한 것은 그 일상성과 평범성이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깊이 없는 악의 이 기이하고 역설적인 특징을 지적한 것이다. 아렌트가 더 나아가지 않은, 급진적인 아렌트 이후 아렌트와 관련하여 진행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은, 아렌트를 동원하여 (탈)전체주의 세계에서의 윤리 규범을 재사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존재인가? 아렌트 이후로 비판적 이론가들에게 폭력은, 이미 그녀가 주장한 대로 권력, 그것의 사적 얼굴, 정치로부터의 일탈과 다르지 않은 서구 자유주의 정치의 핵심적 본질이다. 최근의 비평은 아렌트와 함께, 그리고 그녀와는 달리 작업한다. 이 비평들은 아렌트가 서구 자유주의 정치 전통의 어떤 국면에 대한 이해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은, 그러나 똑같이 그것들 또한 아렌트와 함께하지 않는 한 결코 갈 수 없는 지점까지 그녀를 급진화시킨다. 조르조 아감벤은 아렌트의 작업이 “오늘날조차도 지속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고 했다. 이는 아렌트 속에 함축되어 있지만 그녀 본인은 정면으로 다루기를 원치 않은 어떤 것의 급진화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