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남자가 역차별을 당하고 있고,
여성은 더 이상 불리하지 않으며
지금은 ‘남자문제의 시대’(=여성우위 시대)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있는가?
남성성 사회이론과 젠더 교육의 관점으로 남자문제의 실체를 규명한다
지금까지, 젠더 문제는 여자문제였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대접받을 권리를 쟁취하려는 투쟁에 이어, 교육과 노동 등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데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근거가 된 것은, 아직은 전반적으로 남성이 우위인 사회이며 여성이 교육받을 기회나 취업할 기회, 우월한 지위를 획득할 기회 등을 부당하게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른 것도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 시험이나 상위학교 진학, 행정고시 합격률 등에서 여자가 남자를 앞서고 있다는 보도들이 이어진다. 마치 여성이 더 이상은 불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이렇게 일견, 여성이 더는 불리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은 현실에서 또 다른 주장들을 낳았다. 여성이 더 이상 불리하지 않은데, 왜 ‘여성부’ ‘생리휴가’ ‘총여학생회’ ‘여성전용주차장’ ‘여학생휴게실’ 등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이나 제도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남성에게만 부여된 징병의 의무 탓에 한쪽 성(性)에만 혜택, 또는 기회가 유달리 기운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이런 문제와 주장의 대립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더 크게, 더 일찍이 두드러졌던 서양 여러 나라에서 먼저 있었다. 이러한 남자문제는 ‘학력 경쟁’이 격화되며 두드러진 현상이다. 영국의 GCSE(중등교육자격시험), OECD 국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평가인 PISA, 미국의 대학교 학부과정 진학률, 독일의 김나지움 진학률 등에서 모두 여자의 성적이 남자보다 높거나 진학률이 높았던 것이다. 호주에서는 남자의 학업부진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천만 달러의 교육예산을 의무교육 단계에 투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남자문제의 원인을 찾는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문제를 부진한 남자 개인에게서 찾는 관점과, 가해자인 ‘여자’를 상정하는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으로 보면 남자는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가 되고,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남자는 여성이 우대받는 불리한 입장 탓에 패배한 ‘피해자’가 된다.
서양에서 학령기 남자의 문제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청년기 남자에 더 문제가 집중된다. 문제의 초점은, 취업과 결혼을 하여 사회의 남성 일원인 ‘어른’으로서 자리 잡지 못하는 남자에 맞춰진다. 앞에 말한 패배자/피해자 관점을 거칠게 대입해보자면, 결혼과 연애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을 ‘초식남’으로 정의하거나 취업/연애/결혼을 포기한 ‘3포 세대’라 부를 때는 남자를 ‘패배자’로 상정하는 것이며, 공부를 잘하는 (혹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여자에게 밀려 취업에 실패한 남자는 ‘피해자’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문제는, 과연 남자 ‘개인의’ 문제일까?
아니면 여성 우대와 ‘페미니즘’ 때문에 남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기에 생기는 문제일까?
확실히,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거나, 더 많이 버는 여성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고용 비율을 살펴보거나, 동일 시간 노동 대비 급여액을 살펴보면, 혹은 국회의원이나 고위직 공무원, 기업 경영진의 여성 비율을 살펴보면, 여전히 압도적인 남성우위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남성집단과 여성집단 전체를 비교해봤을 때, 여성에 비해 남성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여성이 남성의 ‘몫’을 빼앗았기에 남성이 불리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여성이 각종 우대정책과 혜택으로 인해 유리한 입장에 섰고, 여성우위 사회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인 다가 후토시는, 이렇게 단언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남성지배체제가 재편되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총체적으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면서, 그러한 남성지배체제의 혜택을 누리는 입장으로부터 배제되는 남성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문제의 시대』, 38쪽)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 격화된 경쟁은 우리를 극단적인 성과주의 싸움으로 몰아넣었다. 청년 남성들의 고용이 안정적이던 시대에는, (적어도 남성들의 경우) 학교를 졸업한 후 노동시장으로의 이행이 매끄러웠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고용이 불안정해졌을 뿐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높게 평가되는 능력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남성적 능력’, 즉 이성(理性), 과제 수행, 물건 제조, 근력노동 등이 높게 평가되었으나, 지금은 보다 ‘여성적인 능력’, 즉 대인 서비스, 케어노동, 인간관계 조정, 커뮤니케이션 등의 능력이 높게 평가된다. 능력 면에서도 남자가 더 이상 유리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근대사회의 노동시장에서 남성들은 더 높은 가치와 더 많은 수요를 가진 능력을 남성적 능력으로 간주하는 젠더화된 능력관과, 능력 발휘 경쟁에서 여성의 배제와 주변화라는 이중의 어드밴티지 덕분에, 성별 속성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할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더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많은 남성들의 안정된 고용과 수입은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사회 전체의 고용 증대와 기업조직의 확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또한 이렇게 젠더화된 메리토크라시에 의해서도 지탱되어왔다.” (『남자문제의 시대』, 87쪽)
“말하자면 신자유주의하에서 재편되어가는 오늘날의 기업사회는 재정의된 ‘남자다움’을 성취한 일부 여성을 ‘명예 남성’으로 그 중심에 끌어들이는 한편, 그런 ‘남자다움’을 성취하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 곧 대부분의 여성과 점점 더 많은 남성을 주변화하면서 여전히 ‘진짜 남자’에 의한 ‘진짜 남자가 아닌 자’의 지배를 유지해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피해자로서의 남자’ 논자들의 주장과 달리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은 “여자에게 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업사회에서의 ‘남자다움’의 성취를 둘러싼 남성 간 경쟁에서 진 것이다. 그들의 몫이 줄어듦으로써 가장 혜택을 누리는 것은 여성들이 아니라 기업사회의 중심에 위치하는 다른 남성들이다. 일정한 비율의 남성들을 ‘진짜 남자’로부터 배제하고 사회에서 주변화시키는 것은 신자유주의하에서 진행되어온 남성지배체재의 재편 과정인 것이다.”(『남자문제의 시대』, 39쪽)
그렇다면 교육현장에서는 남자의 학업부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러면서 ‘젠더평등의 관점’에 어긋나지 않는 교육을 하려면?
남녀공학은 평등한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여학교/남학교는 그렇지 않은가?
불평등에 뿌리를 둔 신자유주의 체제의 교육현장에는
어떠한 젠더상(像)이 필요한가
이 책의 후반부는, 교육현장에서의 젠더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칙상의 ‘남녀평등’이 제도나 법의 형태로,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중시하는 가치로 공유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든 남자든, 한쪽이 차별당하는 교육방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이 ‘평등’이라는 가치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동시에 추구하려면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 딜레마는 일본의 ‘남녀평등교육’ 연구실천 학교로 지정된 한 초등학교의 사례를 통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서술한 2001년도 3학년생의 ‘공개수업’에서는 가방 색이 빨강과 검정에 편중되어 있는 반면 필통과 옷 등 다른 소지품의 색은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반드시 성별로 색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