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환하고 모호하고 투명한 햇빛을 말로 적어낸 결정적인 감정, 슬픔에 대한 단 한 편의 시 2010년 『시와 반시』로 등단한 박지혜 첫 시집 『햇빛』(문학과지성사, 2014)이 출간되었다. 조용하고 잔잔한 시편들 속에는 4년여의 시간 동안 쌓인 시와 언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깊이가 묵직하게 전해져온다. 박지혜 시의 화자들은 언뜻 읽는 이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가도 읽어가다 보면 아주 사적인 혼잣말을 엿듣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비슷한 문장이 겹쳐지는데 의미소들은 오히려 낱낱이 흩어져 지시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유명한 지역을 이야기하는데 완전히 낯선 곳 같고, 일상적인 풍경을 묘사하는데 실제가 아닌 듯하다. 박지혜는 언어에 내장된 불안을 기반으로, 기표와 기의의 합치 불가능성을 도구로 삼아 문장을 산산이 분해하고 빈틈을 열어 ‘진실로 통하는 이야기’의 자리로 만들어간다. 진실로 통하는 이야기는 공통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다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 「시작」 부분 이 시집의 첫번째 시 「시작」의 첫 구절이다. 시인은 “햇빛”으로 말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에 실린 시의 제목도 “햇빛”이라는 점이다. 박지혜 시집은 이렇게 한 권이 한 편의 시처럼 구성된다. 햇빛의 투명한 물질성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앞에 두고 시인은 말 대신 생각과 감정과 발음 같은, 말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말의 근거가 되지만 말이 없으면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시는 거듭 다시 시작된다. 박지혜 시의 화자는 작정하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서, 시는 말과 말의 선택과 나열로서 하나의 결정인 동시에, 스스로 그 선택과 나열을 지우는 운동 내지는 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박지혜 시가 보여주는 것은 감정이라 단정할 수 없는 기분이나 느낌 같은 것,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시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는 의지라고 말해서는 부족하다. 박지혜의 시는 그런 의지로부터 생겨났던 무수한 시도가 어떤 지점에서 실패했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 문학평론가 김나영 해설을 쓴 김나영은 박지혜를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에 빗댄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 셰에라자드에게는 죽음을 앞둔 불안이었다면, 박지혜에게는 말의 실패를 예감한 불안이었을 것이다. 순간의 감정과 개별적인 기억으로 구성된 시의 화자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받아 적는 동시에 의도한 것과 멀어지고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지혜는 의도적으로 시어의 의미를 분해하고 느슨해진 말들의 성긴 틈 사이로 햇빛처럼 모호해진 말들의 이력을 담아낸다. 시의 자리는 어디일까 시가 지시하는 말과 그 말이 불러오는 대상의 관계를 가장 헐겁게 유지하는 언어예술이라는 점에서 박지혜 시는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가장 증폭시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시인 중 하나일 것이다. 시인은 특정 명사를 반복하여 등장시킴으로써 ‘그게 뭐지?’라는 물음을 유도하고, 이로써 궁극적인 대상에 가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지시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특히 어떤 장소나 지명을 등장시켜 일상에서 공고하게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를 헝클어뜨리고 그 안에 새로운 이야기를 삽입할 수 있는 ‘여지의 공간’을 열어낸다. 내가 알래스카를 생각하니 사람들은 알래스카 얘기밖에 안 해요 내가 갈라파고스 거북을 생각하니 사람들은 적도에 가야 한대요 [……] 말없이 약속 없이 갈 수 있는 곳 까닭 없는 혼잣말을 완성하는 곳 - 「쌍둥이 미루 어리 나」 부분 당신이 문을 열고 이곳에 들어왔을 때 암스테르담의 잿빛 하늘이 떠올랐어요 알래스카나 아이슬란드도 상관없지만 진실한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워 암스테르담이죠 [……] 어둠에서 어둠까지 암스테르담으로 갔지요 한 번도 가지 않은 암스테르담으로 갔지요 - 「R의 드릴」 박지혜 시에서 ‘알래스카’라는 단어는 북아메리카 북서쪽 끝을 향하지 않으며, ‘암스테르담’ 역시 네덜란드의 수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곳들은 “말없이 약속 없이 갈 수 있는 곳” “까닭 없는 혼잣말을 완성하는 곳”이며 사실 “알래스카나 아이슬란드도 상관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그곳은 기존의 문법이 억압으로 작용할 수 없는 자유의 공간이자 ‘시의 자리’다. 의미가 해체된 자리는 아무것도 남지 못한 무(無)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성글어진 의미망 사이사이에야 비로소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한 이야기”와 “결정적 감정”이 깃든다. 감정은 무엇이 되었나 이 시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은 감정에 대한 관념이다. ‘기쁨’ ‘슬픔’ ‘고통’ ‘웃음’ ‘울음’ 등이 특별한 인과 없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곧잘 대비되는 감정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쁜 것들을 보면 왜 눈물이 나려 할까”(「지나가는 사람」), “기쁨과 슬픔이 얼마나 가까운지”(「R의 드릴」). 또한 박지혜의 시에서 감정은 “풀” “건초 더미” “젖은 숲” 등이 되었다가, “푸른꽃”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가 차갑게 언 “얼음”이나 “겨울”로 드러나기도 한다. 감정의 예측 불가능성, 무정형성은 그렇게 언어적 변이로 재현되며, 마치 영화의 몽타주처럼 분절된 채로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는 유동적이고 열린 이야기의 가능성을 떠오르게 한다. 목적 없이 떠다니는 일은 슬펐는데 슬픔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어떻게 오는 걸까.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소년과 아무도 없는 방파제에서 내려오지 않는 소녀를 상상한다. 어린 시절 어제의 사랑 어제의 이별 허기 그리고 죽음을 닮은 몇 개의 단어들. 나도 모르게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감정들. 오늘은 상상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얼룩을 새기듯 쓴 적이 있다. - 「거품섬」 부분 무리하는 슬픔, 그리고 여전히 이름만 생각하는 슬픔, 풀 건초 더미 젖은 숲 야생 딸기 고래 울음 미루나무 비단 구두 서진 서표 아이슬란드의 봄 쇄빙선 절대영도 달 윤슬 -「하루」 부분 박지혜는 사적인 감정을 재료로 삼더라도 단순한 감상에 빠지지 않고 특유의 ‘감성 형식’을 표현해낸다. 명사의 반복이 일상에 초현실적인 시적 공간을 삽입했다면, 단어의 이질혼종적 조합은 궁극의 감정, 결정적 지시체를 드러낸다. 시인은 그렇게 모호에 모호를 더하여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데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 시집 해설 박지혜의 시를 읽고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모든 이야기의 기원이자 예고편이라는 전언은 세헤라자데의 경우에도, 박지혜의 경우에도 들어맞는다. 일천 밤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다음에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박지혜의 시를 통해 수정된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햇빛 아래” 끝나지 않을 것처럼 흐르는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야기는 계속될까, 왜 시는 거듭 쓰일까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곳에 우리는 있었다”고. ■ 뒤표지글 그곳에서 길을 잃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빛나는 무엇을 보면서, 빛나는 무엇을 본다고 느끼면서, 어떤 통로 같은 그곳에서, 빛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었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조차 잊은 절정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