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문학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히는 작가 폴 오스터가 이번에는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뉴욕 3부작』, 『달의 궁전』, 『환상의 책』 등의 소설로 현대 미국 문단의 최고 작가로 자리 잡은 오스터는 「스모크」(시나리오), 「블루 인 더 페이스」(시나리오, 공동 감독), 「다리 위의 룰루」(시나리오, 감독)와 같은 영화로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이미 각본가로, 또 감독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2007)은 폴 오스터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한 동명 영화의 시나리오로, 오스터가 그간의 작품에서 집요하게 추적해 온 글쓰기의 문제를 영화적 방법으로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폴 오스터가 소설 작품들에서 지금까지 보여 준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관심 있게 보아 온 독자라면, 이번 작품에서는 시나리오라는 장르를 통해 오스터를 만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터는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에서 뮤즈와 조우하는 작가의 이야기와, 또한 다른 뮤즈를 만난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를 중첩시킴으로써 작가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하며, 문학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가 치러야 하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책 뒷부분에는 부록으로 영화 제작 과정에 관한 폴 오스터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영화감독으로서 오스터가 부딪친 문제들과 소설이 아닌 영화를 창조함에 있어서의 고민, 영화 제작상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야기를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은 <이야기를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종의 액자식 구조인 셈인데, 오스터의 작품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형태이다.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오스터는 <이야기>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마틴이 처음 친구의 집에 도착해 벽장에서 타자기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내레이션 라는 말은 거의 그대로 마틴이 치는 타자기에 물린 종이에 옮겨진다. 영화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영화 속 인물이 타자기로 치는 글이 겹치면서 이후의 상황이 그냥 단순히 영화의 이야기인지 영화 속 인물이 쓰는 소설 속 이야기인지 애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클레어라는 여인의 존재로 인해 더욱 증폭된다. 마틴의 친구 레스토의 조카이자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인 클레어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여인이다. 그녀는 마틴이 글을 쓰도록 독려하지만, 동시에 그가 글을 쓸수록 죽어 간다. 그녀는 정말 평범한 대학생일까? 친구와의 통화로 마틴은 클레어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지만, 이미 그녀에게 빠져든 그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마침내 마틴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끝낸 순간 그녀는 숨을 거두고, 그녀가 바로 자신의 뮤즈였음을 깨달은 마틴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원고를 불태운다. 상식적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이것은 이야기인가, 이야기 속 이야기인가?
클레어가 마틴을 떠나는 순간 마틴 앞에 새로운 인물인 보일러공 포르투나토가 등장한다. 순박한 시골 보일러공이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이 사나이 역시 글을 쓰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이디어는 꽤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흥미를 느낀 마틴은 포르투나토의 원고를 읽어 보지만 정작 실제 작품은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숙한 것이었다. 곧 마틴은 포르투나토에게도 자신의 클레어와 같은 뮤즈가, 하지만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불완전한 뮤즈가 찾아왔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로, 결국 그녀가 클레어와 마틴을 다시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마틴이 다시 클레어를 만나는 장면에서 다시 타자기를 치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것이 소설 속 백일몽이었음을 암시하며 작품은 끝난다.
영화 제작 과정
이 영화에는 모두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장소 또한 교외의 어느 집, 숲길 정도로 매우 한정되어 있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스터는 아예 이를 염두에 두고 제한적 인물과 장소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마틴 프로스트 역에는 데이비드 듈리스(1993년 「네이키드」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클레어 마틴 역에는 이렌 야코브(1991년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로 역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와 같은 실력파 배우들이 참여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더했다.
이 영화는 다소 복잡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데, 그 태동은 19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단편 시리즈 중 한 작품으로서 쓰인 이때의 작품은 두 명의 인물만 등장하며, 마틴이 원고를 태워 클레어를 살려 내는 데서 끝난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무산되었고 이 이야기는 한동안 묻혔다가 소설 『환상의 책』(2002)에서 빛을 보게 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짐머가 수수께끼의 배우 헥터 만의 영화를 보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까지 등장시키고도 아쉬움이 남았던 오스터는 다시 이를 확장하여 장편으로 찍기로 하고, 마침내 제작자를 찾아 2006년 촬영에 들어가 2007년 3월 개봉하기에 이른다.
오스터의 팬들이라면 영화 내레이터는 폴 오스터이며, 안나 역할은 오스터의 딸인 소피 오스터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이름만 나올 뿐인 마틴의 친구 레스토(Restau)는 오스터(Auster)의 알파벳을 뒤섞은 것이며, 영화 도입부 친구의 집에 놓여 있는 액자 속 사진들은 실제 오스터와 그 부인 시리 허스트베트의 사진인 것도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잔재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