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사랑도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살아낸 오스카 와일드
차디찬 감옥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
그가 절절히 써내려간 뜨거운 삶의 고백록
『심연으로부터』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레딩 감옥에서 동성의 연인 앨프리드 더글러스(1870~1945)에게 쓴 편지다. 와일드의 전기를 쓴 비평가 리처드 엘먼은 이 글을 가리켜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하고 긴 러브레터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부터 ‘옥중기(獄中記)’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오랫동안 읽혀왔다. 와일드가 감옥에서 쓴 글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붙인 제목일 테지만, 이 책은 사실 절절한 연애편지이며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참회록이라기보다는 명상록에 가깝다. 와일드는 이 책에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연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거침없이 표현하며, 지나온 삶을 깊이 성찰하고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드러낸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예술가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길 바랐던 오스카 와일드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다.
치명적인 사랑과 나락으로 떨어진 삶
유미주의의 주창자로 이름을 날린 와일드는 1891년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문학·예술 평론집 『의도들』, 단편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 동화집 『석류나무 집』을 출간하고, 희곡 『살로메』의 집필을 끝내며 작가로서 정점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해에 그의 삶을 끝없는 격랑 속으로 몰고 간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 만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아홉 번이나 읽고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온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다녔던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의 재학생으로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3년 동안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와일드의 삶을 철저히 파괴했다. 더글러스는 과격한 성격에 낭비벽이 있었으며 와일드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도 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는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퀸스베리 후작은 자신의 아들과 와일드를 떼어놓기 위해 그를 공개적으로 비방하고 다녔다. 그들 부자에게 지칠 대로 지친 와일드는 결국 퀸스베리 후작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그러나 1895년 열린 수차례의 재판은 여러모로 와일드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그는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는다. (더글러스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와일드의 재판이 시작된 다음날 유럽으로 떠나 3년간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유죄선고를 받자 런던의 극장과 서점가에서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런던 최고의 유명 인사에서 무명의 죄수로 한순간에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독일로 떠났으며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다. 그는 두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그 후손은 와일드라는 성을 되찾지 않았다.
와일드가 복역했던 19세기 말 영국의 교도소는 말 그대로 끔찍했다. 그는 무거운 형벌과 고된 노역, 배고픔과 추위, 일상적인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와일드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지적 허기였다. 그러다 복역중에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의 배려로 와일드는 책을 읽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교도소장은 와일드가 쓴 편지를 모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그가 출소할 때 돌려주었다. (당시 레딩 교도소에서는 편지를 하루에 한 쪽밖에 쓸 수 없었고, 다 쓴 편지는 펜과 함께 바로 반납해야 했다. 그래서 이 편지에서는 종종 문법적 오류나 잘못된 문학적 인용이 발견된다.) 『심연으로부터』는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쓰인 지 65년 만에 출간된 『심연으로부터』 원본
1897년 5월 19일 출소한 뒤,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그다음 날 프랑스 디에프에 도착해 로버트 로스를 만났다. (로버트 로스는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으로 그의 가장 충실한 친구였다. 그는 죽어서도 와일드와 함께 묻혔다.) 그는 로스에게 편지 뭉치를 건네면서 한 부는 타자해서 간직하고 원본은 더글러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로스는 원본은 자신이 갖고 한 부를 타자해서 더글러스에게 주었다.
이 편지는 1905년 독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같은 해에 런던에서도 편지의 삭제판이 출간되었다. 당시 로스는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더글러스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구절을 삭제했는데 무려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분량이었다. 그래서 원본이 공개될 때까지 일반 사람들은 이 편지를 와일드의 단순한 참회록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본 또한 대부분 이러한 삭제판을 대본으로 하여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는 1905년 로스가 삭제판을 펴내면서 붙인 제목이다(구약 시편 130편). 와일드가 처음에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Epistola: In Carcere et Vinculis)’이다. 로스는 향후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편지의 원본을 영국박물관에 맡겼다. 편지의 수신인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12년이었다. 로스의 친구 아서 랜섬이 『오스카 와일드: 비평적 연구』라는 책에서 로스가 알려준 삭제된 구절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더글러스는 랜섬과 편집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랜섬은 다음 쇄에서 문제가 된 구절들을 삭제했고, 로스가 요구한 대로 더글러스 생전에는 와일드의 편지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비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로스는 와일드의 차남 비비언 홀랜드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타자한 편지를 전해주었다(이 원고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고, 특히 로스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와 퀸스베리 후작을 비판하는 대목을 100여 군데나 삭제했다). 1945년 더글러스가 사망하자 비비언은 1949년에 로스에게서 받은 불완전한 원고를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와일드는 편지는 1962년, 쓰인 지 6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마지막 날들
와일드가 이 기나긴 편지를 쓴 중요한 동기는 편지를 다 쓰고 출소를 기다리고 있던 1897년 4월 1일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자네가 나의 문학과 관련한 유언집행자가 되려면 퀸스베리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나의 기이한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문서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할 거야. 이 편지를 다 읽으면, 자넨 그 속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음의 극치와 천박한 허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내 행동에 대한 심리적인 해명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거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더글러스의 생전에는 아닐지 몰라도. 하지만 난 언제까지고 저들에 의해 기괴한 공시대에 매달려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이 영원히 퀸스베리 부자의 방패막이와 무기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내 행위에 대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단지 해명할 뿐이지.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감옥에서의 나의 정신적 성장과, 지난 삶에 대한 지적 태도와 나의 기질의 필연적인 변화를 다루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변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내 편에 서 있는 이들이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기를 바라.
출소 후 와일드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배스천 멜모스라는 가명을 쓰며 지냈다. 마지막 작품이 된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출간하긴 했으나 더 이상은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