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예술의 정치, 사회, 문화적 동기와 그 작동 메커니즘을 밝힌 미술비평의 고전
『권력의 미학』은 미술 작품이 제작되고, 보여지고, 이야기되는 과정을 통해 예술이 작동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동기와 그 작동 메커니즘을 다층적으로 분석한 캐롤 던컨의 주요 논문과 비평문을 모은 책이다. 던컨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진보적 운동과 페미니즘의 부활, 그리고 동성애 인권운동에 관한 연구와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미술사와 비평의 만남 및 좌파와 페미니즘의 조합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미술작품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힘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 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 즉 18~19세기 프랑스 미술에 투영된 가부장제와 이를 통해 생산된 여성 이미지에 대한 글부터 20세기 초반의 유럽과 미국 전위미술에 나타난 여성의 성적 대상화, 이에 더해 그런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일종의 공적 의례가 된 상황을 담은 글까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미 미술사는 물론 미술비평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진보를 표방하면서도 여성이 당하는 성적,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외면했던 1960~70년대 미국 미술계와 학계 남성들의 이중성에 대한 던컨의 분노를 지금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와 연결시켜 생각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던컨의 글은 자본주의 계급관계에 민감한 사람이 성적인 층위에서 타인에 대한 지배에는 얼마나 둔감할 수 있는지, 작가의 성적 권위가 어떻게 상류층으로 전이되는지, ‘진보(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이 얼마나 ‘특정 부류’의 시각인지 명료하게 지목한다.”
위 두 인용문은 이 책을 공동 번역한 이혜원 교수와 황귀영 작가의 글이다. 두 사람은 캐롤 던컨의 제자이자 동료로서 “미술은 누구의 욕망에 봉사하고 있는가?”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에 대해 던컨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왔는지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연구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작품 전시와 기획을 하고 있는 현직 미술사가로서 한국 미술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폭력과 차별에 대항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이 던컨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더없이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역자의 이러한 이력과 문제의식 덕분임이 분명하다.
성적 권력 게임,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미술사
예술작품을 역사의 과정을 따라가며, 역사적 문맥을 통해 탐구하는 작업은 시대에 대한 이해는 물론 예술작품과 예술가, 그리고 미술사에 관한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은 성에 관한 새로운 인식 혹은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 책 속 글들이 전해주고 있는 ‘성적 권력 게임으로서의 미술사’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던컨은 이 책 곳곳에서 미술사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조명, 그것을 성적 권력의 게임장 혹은 성적 권력의 게임 과정으로 재구성하였다.
18세기 프랑스 미술은 당시의 관습적인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한편 사회 통념에서 어긋난 사랑을 공공연하게 찬미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영향이 강해지자 미술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상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애로운 부모, 행복한 가정, 부부애와 가족 간의 조화라는 새로운 관념을 그림에 의도적으로 투영하기 시작한다. 디드로의 <살롱>, 그뢰즈의 <행복한 어머니>, 프라고나르의 <귀가> 등은 모두 이러한 ‘계몽주의 캠페인’의 결과물, 즉 계몽주의라는 성적 권력이 행한 게임의 결과물이었는데, 문제는 ‘새로운 이상적 가족’을 하나로 묶는 중심이 늘 ‘그녀’, 즉 아내거나 어머니였다는 점이다.
미술이 새롭게 생산하고, 재생산을 거듭한 ‘그녀’는 남편의 육체적, 정서적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여야 했고, 자녀들에게는 좋은 엄마이자 보모여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남편의 욕구나 자식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중시하며 살았던 18세기 귀족 여성은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존재가 되었고, ‘그녀’의 자리에는 이제 가족을 위해 아내와 어머니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개인적, 사회적 만족감을 얻도록 교육받은 여성만이 남게 되었다. 즉, 중산층 가정에서 찬미되었던, 만들어진 아내의 이미지와 강요된 모성에 의해 강제된 여성만이 남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 야수파, 입체파, 독일 표현주의를 비롯한 여타 전위미술가가 그린 수백 점의 누드화 및 여성을 무력하고 성적으로 종속된 존재로 묘사한 그림들은 던컨이 보기에 남성의 성적 지배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이들 작품 속에서 여성은 살덩이로 격하된 채 ‘남성 작가’ 앞에 힘없이 눕거나 서 있고, 육체는 ‘남성 작가’의 욕망에 따라 왜곡된다. 심지어는 ‘남성’ 작가의 공포를 이야기하는 데도 이용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저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있다.
드 쿠닝의 괴물 같은 여성 이미지 또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열등감과 공포가 투영된 것이다. 피카소, 마티스 등 모더니즘의 ‘대가’로 추앙받는 수많은 전위미술가들은 이후 20세기 미술에서 중시된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냈지만, 그들 작품 깊숙한 곳에는 고대 신화로까지 거슬러 가는 남성들의 거세 공포증이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위미술가들의 이런 작품들은 남성의 성적 권력과 비록 무의식의 차원이긴 하지만 여성의 성적 권력이 동시에 벌이는 게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까?
정치, 사회, 문화 권력을 작동시키는 미술이라는 권력
미술사의 대상인 미술 혹은 미술비평은 정치, 사회, 문화 권력을 작동시키는 또 다른 권력이 되기도 하는데, 그중 첫째가 18세기 후반, 프랑스 살롱 회화다. 프랑스혁명은 군주제뿐 아니라 가족 내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권위마저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몰락에 대한 미술의 반응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살롱 회화에서 잘 드러난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살롱에서 선보인 이들 그림들은 양가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그뢰즈와 디드로의 풍속화 속에서, 그리고 오이디푸스와 벨리사리우스 같은 인물을 내세운 역사화 속에서 타도된 왕과 추락한 아버지는 힘없고 어리석은 노인 이미지로 전락한 채 묘사된다. 이에 더해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암묵적 적대감을 드러내는 레뇨의 작품은 구질서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전해주며, 다비드의 작품에 보이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기대는 혁명에 대한 묵시적 동의로 읽힌다. 즉 새로운 권력을 작동하는 추동력이 되려 했던 것이다. 반면,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약>은 왕정복고를 통해 프랑스혁명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이들의 정치적, 이념적 지향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으로, 즉 과거 권력을 추동하려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비평 권력의 독점이 있다. 근대 이후 미술비평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봉사해왔다. 그리고 모건, 록펠러 가문에 이어 IBM, 엑손, 모빌 등 대기업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온 미술 시장과 아카데미 미술에서 미술비평은 오늘날 독점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권력의 불균형 혹은 권력의 부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던컨은 변화무쌍한 공간들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된 《노동의 이미지》 전시와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들로 구성된 작가들이 벌인 《베트남의 경험》전 등을 일례로 제시하면서, 이에 더해 미술 권력의 절대 공간으로 존재하는 뉴욕 현대미술관이 포르노적 요소를 구성 테마로 삼고 있다는 점을 통해 그것이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들에게만 부여해온 권력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예라는 사실을 치밀하게 분석해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권력의 해부,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 비평이 나아가야 할 길
『권력의 미학』에 수록된 여러 글들은 또한 미술비평을 통해 비평이라는 권력을 해부, 비평이라는 권력의 욕망과 허위를 파헤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