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무대(scene)에서 벗어나(ob-), 삶과 예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길 제안하는 저널 『옵.신』 9호가 출간되었다. 지난 7호에서 『옵.신』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출간 150주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발표 50주년을 맞아 역사적 변환들을 돌아보고, 이어진 8호에서 50주년을 맞은 '1968년 5월'의 파장이 오늘날 삶과 예술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살폈다. 이번 9호는 20세기의 정치적, 미학적 기획과 모색이 실패로 돌아간 후 갈수록 확산하는 국가주의를 재고한다.
"빈틈없던 냉전의 종식, 독일 통일, 유고슬라비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파도처럼 이어진 사건들은 꽤나 기이했다. 불특정한 세력이나 범죄적 조직에 힘입은 인종적, 종교적, 국가적 노선들의 과격한 충돌이 폭발했다. 브렉시트로부터 러시아의 '유라시아' 환상,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및 남중국해 점거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완전히 장악한 국수적 예외주의는 2020년 팬데믹 이후 돌이킬 수 없이 심화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를 공기처럼 여기는 오늘, 제3의 노선, 제3의 미학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당연시 받아들이는 국가의 존재를 의심하고, 그 이면을 떠받치는 사고와 제도의 역사적 궤적을 캐묻고, 현재 예술과 삶이 처한 자리를 직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nation)란 무언가? '민족'(nation)이란 무언가?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오늘날 어떤 새로운 경로를 거쳐 재생산되고 변형되는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막막하기조차 한 질문이지만, 이를 묻지 않고서는 당장의 현실을 옥죄는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암막도 걷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청된 화자들은 근대화의 역사적 궤적을 따라가며 국민 국가 형성과 민족주의 개념이 현재와 맞닿는 지점에 질문을 던지고(이택광, 이원재), 과학적 시간과 영화적 서사의 교차를 통해 공동체에 전제하는 동시성 개념을 살피고(서현석), 국가와 자본의 작동 방식과 그 재생산 기능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부의 파열을 제안한다.(정강산) 때로는 "코로나19로 확진된 신천지 신도들의 동선으로부터 n번방 회원들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의 '상상'을 초과하는 '동시대성'이 폭발한 2020년의 상황에 주목하며(유윤성, 시민 z),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희생이 어떻게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고 어떻게 극복되며, 어떻게 재사유될 수 있는지 묻는다.(곽영빈) 국가, 혹은 민족, 또는 번역을 거부하는 '네이션'이란 단어는 언어(프랭크 김), 인종(예카테리나 본다렌코, 탈가트 바탈로프), 시각 문화(최범)를 가로지르고, 국가 아닌 국가들의 모습으로 다가오며(클레가), 동아시아의 식민적 모더니즘(헤리 미나르티, 손옥주, 로이스 응, 마크 테)과 비동맹 운동(보야나 피슈쿠르)을 거쳐 현재의 홍콩 사태(로이스 응, 고금)에 도착한다. 이 모든 '나라 생각'들이 향하는 궁극의 질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프리 레이선) 혹은 아마도 이런,
"우리는 길을 잃었다. 나는 길을 잃었다. 절망하고 마비되고 말이 막혔다. 나는 세상이 지금처럼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절대 못 했다. 정치적 나약함, 부패, 전쟁, 빈곤, 기아, 연대의 실종, 세계를 휩쓰는 포퓰리즘, 자기중심주의, 극단주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의 종식… 오늘의 세상은 이런 모습이다. ... 교감과 연대와 (자기중심주의에 대척하는) 너그러움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쟁과 빈곤으로부터 피신하는 난민들을 우리는 왜 환영하지 못하는가? ... 나는 예술 창작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에 예술과 예술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술이 인류와 사회의 해악에 대한 실질적인 해독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수십 년 동안 품어 왔다. 예술의 진정한 효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참고 : 디자인에 관한 주석
"이 호에는 두 가지 활자체가 쓰였다. 한글에 쓰인 활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개발해 무료로 보급되는 바탕체('문체부 바탕')다. 이외 요소(숫자, 로마자, 문장 부호 등)에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파울 레너(Paul Renner)가 디자인한 기하학적 활자체 푸투라(Futura)가 사용됐다. 전자가 한글의 고유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민족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형식을 꿈꿨다. (몇몇 문자에는 최종판이 아니라 레너가 시험했던 실험적 형태가 쓰였다.) 두 활자체는 조화가 아니라 이질성과 대비를 강조한다.
-슬기와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