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통이 진짜 끝나긴 할까요?”
몸이 아픈, 마음이 힘든, 헤어짐이 슬픈,
이 따위 세상에서 도무지 못 살겠는 사람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이들과 그 곁을 들여다보는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이야기의 세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언어 없음’의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고통은 늘 상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값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전환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우리 사회가 고통을 외면하고 고통을 겪는 이를 억압하거나 사회적 공간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해 듣고 응답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다뤄내고 있는 것일까.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전시하면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통을 겪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조차 함께 무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한국 사회 내부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왔던 사회학자 엄기호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통의 지층을 한 겹씩 들여다보면서 발견하고 성찰해나간 우리 시대 고통의 지질학을 보여주는 저서다.
고통의 지질학 _고통을 겪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곁의 풍경에 대하여
남편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선아는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잡았던 그의 마음은 무너져버린다. 친정 부모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그는 혼자 끙끙 앓으면서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을 하며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백혈병 진단을 받은 승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문병하러 찾아오는 것이 귀찮으면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외롭고 원망스러운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돈독한 이였지만, 그럼에도 하필이면 왜 자기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알 길이 없다며 절망하고 있다.
젊은 시절 집안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잘 키워냈고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했던 재희 어머니에게는 일흔을 넘기면서 온갖 노인성 질환이 찾아들었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그는 가족에게 하소연과 비난을 반복하고 있다. “너넨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병원을 전전한다.
대학 교수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덕룡 아버지는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을 겪은 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덕룡 아버지는 동생을 통해 접하게 된 신흥종교에 기대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고립감을 떨쳐내고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준석은 실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말에서도 상처받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이 ‘순진한’ 그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손대기 시작한 것은 식물이었다. 그에게는 말 못하는 식물이 오히려 사람보다 정직하게 느껴졌다.
영화 <공동정범>에 등장하는 이충연의 경우,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나눈 뒤,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명망가들과 이야기하며 자신이 겪은 참사를 세상에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차갑게 바라보기도 한다.
대안 학교 교사인 태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학생들의 질긴 무기력을 깨트릴 수 없었고 자신의 좌절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결국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된 태석과 점점 거리를 둔다.
고통의 언어학 _고통과 대면하고 그것을 말하는 언어에 대하여
이 책의 1부에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자극적이랄 것 없는 모습들이다. 엄기호가 묘사하고 드러내는 이 고통의 풍경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고통에 갇힌 이들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운다. 물론 고통을 겪는 이에게는 주문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종교에 ‘주문’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견디게 하는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문이 방편을 넘어서서 실체가 되면 ‘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된다. 잠시의 고통을 잊게 해줄지 모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의 노예가 되게 한다. 고통에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방해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문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게 만든다.
내면적 언어나 사회적 언어에 기대더라도 고통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말할 순 없다. 고통은 그렇게 하나의 언어로 ‘봉합’되지 않는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이는 절망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온전히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고통에 찬 사람들은 그 무의미함으로 인해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언어의 가능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모든 언어가 결국 허무하기에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는 세계의 파국만이 있고 새로운 구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파국적 결론은 ‘주문’의 기만과 짝패를 이룰 뿐이다. 엄기호는 당사자가 고통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기만을 경계하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장벽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이를 기록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사회학 _고통을 소비하고 전시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 책의 2부에서 살펴보는 지점은 고통의 사회학적 측면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는 유령이 되어 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이 유령들이 죽었을 때만 오로지 그 존재를 눈치 채는 잔인한 사회다. 그렇기에 유령이 되지 않으려면 고통의 참담함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전시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이게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되어 있다.
이런 미학과 윤리학에서 그 곁에 선 이는 그저 ‘현존’하는 존재여야 한다. 현존이란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들어야 하고,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해야 한다.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겨우 유령을 면하고 그나마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곁에 선 이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저 유령으로만 존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