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각 에피소드들을 애써 공통점과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파편 그대로 읽어보라. 둘째, 납치사건이라는 미끼에 한번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읽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셋째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주변에서 동네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기억하고 상상하며 읽어보시길 권한다.
- 김낙호(만화 연구가)의 『아이스헤이번』 해설 중에서
'이름만큼 춥지는 않은 마을' 아이스헤이번. (차가움ice과 따뜻함haven-'피난처'라는 뜻-을 뒤섞은 제목부터 비현실성과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데이비드 골드버그라는 우울하게 생긴 꼬마가 실종된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만화는 데이비드가 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꼬마의 실종 사건이 벌어진 그 기간에
아이스헤이번 주민들 ―조숙한 동네 아이들, 부부 사립 탐정, 중년의 시인 지망생 랜덤 와일더 씨,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바이올렛, 편의점 주인, 문구점 직원 등―이 살아간 아주 소소하고 한심한 일상, 그러나
우리의 삶과도 비슷한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아이스헤이번 사람들은 각자 이상한 사연을 간직한 특이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쩌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역시 누구나 그 중 하나에 해당될 정도로 매우 평범하다. 옆집의 인정받는 시인에게 느끼는
살리에리를 방불케 하는 질투심, 떠나버린 남자친구에게 남은 미련, 그러나 그에게 줬던 선물을 어떻게 돌려받나 하는 고민, 가족에 대한 지긋지긋함, 손님한테 방실거리기는 죽어도 싫은 편의점 직원의 심통, '난 재능은
있는데 왜 성공을 못할까' 하는 의구심. 이런 감정들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보편적인 인간사를 소재로 한 생활 만화 정도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아이스헤이번』은 '초현실적'이라 느껴질 만큼 조각난 이야기들이 엮인 기이한 작품이다. 핵심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이어질 만하면 그냥 끝나버리고, 사이사이에 원래의 이야기와 관련성이 명확치 않은 에피소드가 별다른 설명 없이 삽입되어 있다. 만화 속에는 작품 해설과 저자 소개까지 포함되는 등 이야기의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짧은 이야기들은 각자 다른 스타일의 화풍으로 그려진다. 『아이스헤이번』의 이런 형식적 특징은 주로 미국의 전통적인 신문 만화 형식을 차용한 데서 온다. 미국의 주요 일간지 일요판 만화 면에는
다양한 장르와 화풍을 가진 짧은 만화들이 촘촘히 배치되는데, 그 만화들은 모두 독립적인 개별 작품임에도 마치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반영된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대니얼 클로즈는 '아이스헤이번'이라는 공간적 배경만
같을 뿐이지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짧은 이야기들 사이에 독자들의 시선으로, 혹은 그 이야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파편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 키치성에 대한 애정, 코믹 스트립 장르에 대한 오마주 등 『아이스헤이번』이 이룩한 성취는 대니얼 클로즈가 왜 미국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는지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