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이후 실종된 거대 담론, ‘삶의 쓰레기화’로 복원한다!
왜 TV에서는 ‘도전’과 리얼 버라이어티가 넘쳐나는가?
촛불 시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사라지는 ‘유동적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88만원 세대’, ‘대졸 실업’, ‘이태백’, ‘사오정’ 같은 음울한 유령들이 지금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인격이 사람됨을 결정하는 시대를 넘어 능숙한 영어 구사 능력, 재빠른 현실 감각,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비정함이 실격(失格) 인간을 결정하는 잣대로 등장해 사람들을 항상적 공포와 전지구적 이동으로 몰아넣으며, 가족까지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들 ‘쓰레기가 되는 삶들’, ‘버려지는 인간들’이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디지털 첨단화와 경제 발전과 지구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스팸 메일’이라는 형태로 매일같이 최첨단 디지털 매체에서 뿌리는 ‘쓰레기’에 덮여 살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는 인간이 쓰레기의 양산자이자 피해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이후의 사회에서는 모든 안전과 (사회)보장이 사라지고 매사每事와 매일每日이 ‘도전’이 되리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거대 담론이 ‘문화론’이나 문명의 충돌론으로 대체되면서 우리 삶에 대한 섬세하면서고 구조적인 인식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래의 인용문이 잘 보여주듯이 디지털 문명의 본산 실리콘 밸리와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종횡무진하면서 우리 시대를 인간 자체의 쓰레기화로 진단하고 있는 바우만의 이 역저는 우리 시대에 대한 우울한 진단서이자 ‘지구화’하는 말만 들어도 울렁증을 느끼는 우리에게 진짜 무엇이 문제인가를 차분하게 진단해주고 있는 새로운 처방전이기도 하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자 현대판 멋진 신세계의 전진 기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236쪽)
스타이너가 ‘카지노 문화’라고 명명한 이런 문화에서 모든 문화적 산물의 가치는 최대의 효과를 짜낸 후 얼마나 빨리 낡아빠진 것으로 만드느냐를 기준으로 계산된다.(215쪽)
옛날의 빅브라더는 포함 ― 사람들을 대열에 정렬시키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통합 ― 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 ―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 ― 이다.(241쪽)
진보의 다른 이름, 인간의 쓰레기화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쓰레기’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날 사회를 진단한다는 점이다. 왜 ‘쓰레기’인가? 바우만에게 현대화의 역사는 한편으로 진보와 생산의 역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쓰레기 생산의 역사이다. 현대화 과정,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이 만들어낸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갈수록 더 많은 쓰레기가 생겨나게 된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생산 욕구에 이끌려 소비자들은 더욱더 빨리 상품을 소비하고,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를 요구받는다. 모든 상품은 마치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쓰레기’ 개념이 우리를 더욱 경악시키는 것은, 그것이 산업 쓰레기와 같은 물질적인 쓰레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나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이, 인간의 삶이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쓰레기’라는 용어가 그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한, 그리고 그럼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생산과 소비 양 영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 채 과잉, 잉여, 초과 인구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가 되는 일만이 남은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바우만은 ‘쓰레기 생산’이 현대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라 지적한다. 현대화 과정의 밑바탕에는 더 좋은 사회, 진보한 사회가 가능하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현재의 상태는 불완전하고 더욱 개선되어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현대화 과정의 주요 강령이었다. 사회 진보를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이라는 열매를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인간 쓰레기’도 생산했으며 그것을 더욱 가속화했다.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갈수록 적은 사람만이 필요하게 되었고, 생산과 소비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이들을 생산 영역으로, 그리하여 소비 영역으로 다시 투입할 수 있는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일이 문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집안에 있는 도구와 자원만으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 일시적 하락의 문제, 경기 과열과 또다른 경기 상승 사이의 경기 후퇴 문제가 아니다. 세금, 보조금, 수당, 인센티브 따위로 살짝 땜질해 ‘소비자 주도의 경기 회복’을 다시 한 번 불러오면 사라져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릴 일시적인 자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들은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40쪽)
지구는 이제 만원이다, 전지구적 쓰레기 생산
현대화 과정의 초기에는 ‘인간 쓰레기 생산’이 일부 선진 국가들에 한정되었다. 그 국가들은 자국의 잉여 인간들을 ‘저발전’ 지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간 쓰레기 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식민화와 제국주의적 정복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목적”(22쪽)이었다. 바우만은 “현대화된 지역은 지역에서 발생한 ‘과잉 인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구 전역에서 찾으려 했고 또 발견할 수”(23쪽)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지구는 만원이다.”(20쪽) 더이상 자국의 ‘인간 쓰레기들’, ‘잉여 인간들’을 보낼 수 있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축적한 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뒤늦게 현대화에 뛰어든 이른바 ‘개발도상국’들은 그 어떤 외부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해결책(23쪽)”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부류의 좌절과 운명의 역전은 전례가 없던 현상인 ‘잉여 인구’와 그것의 처리 문제에 최근에야 직면하게 된 지역들에서 한층 더 증폭되고 첨예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에 ‘최근’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는 이미 만원이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쓸 ‘빈 땅’은 전혀 없고, 현대인들로 이루어진 가족에 새로운 구성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경계선의 비대칭성이 확고히 굳어졌다는 뜻이다. 그들 주변의 나라들은 그들의 잉여를 반기지 않을 것이며, 과거에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강제적으로 잉여를 수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대(성)의 후발 주자들’은 전지구적인 원인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134쪽)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는 가난한 국가의 난민들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때로는 합법적으로 그러나 대부분 불법으로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 이른바 “가난한 자들의 제국주의”(135쪽)라는 역설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