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살아생전의 유일한 시집 『피곤한 노동』부터
사후에 출간된 『냉담의 시』까지 파베세 시의 모든 것!
숨은 작가, 낯선 작가, 바깥의 작가를 소개해온 ‘인문서가에꽂힌작가들’ 시리즈에서 이탈리아 신사실주의(네오리얼리즘)의 대표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시 전집이 출간됐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감성으로 20세기 중후반 여러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비운의 작가. 소설가로 명성을 얻기 이전 그는 시인이었다. 고도로 상징 시어와 추상 관념에 기댄 기존 에르메티스모(헤르메스 신비주의) 시인들의 순수시를 거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을 담담하게 시로 이야기함으로써 당대 이탈리아 문학을 쇄신했던 인물, 체사레 파베세. 살아생전 유일한 시집이자, 민중의 삶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 『피곤한 노동』부터 마흔두 살로 세상을 등진 그의 절명시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가 포함된 『냉담의 시』까지, 파베세가 쓴 모든 시를 모아 2권으로 펴냈다. 이들 시집에서 청춘의 모험 앞에 전율하는 시인 파베세, 사랑의 추구와 좌절로 고뇌하는 우리와 닮은 인간 파베세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을 믿었고 사랑을 믿었다,
배신당할지언정, 거기서 낙원을 봤다.
시는 파베세 문학의 모체였다. 짧은 삶을 살면서 한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작가 파베세.
절망과 낙담의 아이콘이 아닌 참된 목소리로 소외된 민중을 노래했던 그를 주목한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고뇌하는 삶과 문학, 사랑의 추구, 이것이 그를 다시 음미하는 이유다.
체사레 파베세 시 전집01 『피곤한 노동』
이탈리아 시단에 새바람을 일으킨 파베세의 대표 시집
파베세의 첫 시집 『피곤한 노동』은 두 가지 판본이 있다. 먼저 초판은 1936년 피렌체의 솔라리아 출판사에서 나왔다. 파시스트 당국의 검열에 따라 외설을 빌미로 4편(「디나의 생각」, 「숫염소 신」, 「발레」, 「아버지」 등)이 삭제되고 나머지 45편만 실렸었다. 그리고 최종판이 1943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나왔다. 초판에서 검열로 삭제된 시 중 3편과 1936년 이후에 쓴 28편의 시를 합치고 초판 시들 중 6편을 제외하여, 총 70편의 시를 수록했다. 또한 이 최종판 시집에 작가는 자신의 창작 과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산문 2편(「시인이라는 직업」, 「아직 쓰지 않은 시들에 대하여」)도 부록으로 추가했다. 이번에 출간된 ‘인문서가에꽂힌작가들’의 체사레 파베세 시 전집01 『피곤한 노동』은 1943년 최종판을 완역한 것이다.
체사레 파베세는 유년기에 잠시 살았던 고향 언덕을 이상화(신화화)했다. 청년기와 장년기를 공장 굴뚝에서 연신 매연이 피어나는 도시, 북이탈리아 최대의 산업도시 토리노에서 살면서, 그가 항상 그리워했던 것은 후미진 산중에서 퇴락해가는, 되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공간 산토스테파노벨보였다. 언덕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곳 란게 계곡은 피에몬테 지방의 아스티와 쿠네오에 걸쳐 있는 타나로 강, 벨보 강, 보르미다 강 주변에 펼쳐진 구릉지대로, 낮은 란가, 높은 란가 등 다양한 지형적 특색을 띤다. 언덕이라곤 하지만 해발 800미터가 넘는 높은 산봉우리가 있을 만큼 험하다. 농업 위주였던 그곳은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된 토리노와 달리 낙후되어 많은 주민들이 궁핍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경제적 고통에 설상가상 파시즘이라는 정치적 불안이 더해진 시대 상황에서 파베세는 약자인 민중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토리노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파베세는 평생 많은 문학작품을 번역했다. 영미 문학에 대한 관심, 특히 미국 문학에 대한 열정은, 그가 1930년대 이탈리아 시인들이 자기 내면으로 퇴각해 관념과 추상에 몰두할 때 그것과 거리를 두면서, 신사실주의의 독특한 민중주의를 여는 한 방편이 되었다. 『피곤한 노동』에 수록된 시들은 당시 이탈리아 주류 시단의 작품들과 사뭇 달랐다. 그는 현실의 공간인 토리노와 이상화된 희망의 공간인 산토스테파노벨보, 이 두 공간을 무대로 여러 계급의 인물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내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작가 스스로 ‘이야기 시’를 짓고 있다고 분명히 자각했을 만큼, 장시의 형식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 무심하게 던져놓는다. 이것들은 「남쪽 바다」나 「선조들」처럼 설화적으로 윤색되는가 하면, 「시골 창녀」나 「데올라의 생각」처럼 밑바닥 인생을 가감 없는 노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이들의 속사정을 들춤으로써 엘리트가 아닌 서민의 심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세상살이에 찌든 민중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정서는 겉으론 비관적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시골 창녀, 포도나 호박을 훔치는 늙은 노인, 과부, 마차꾼, 술 취한 노파, 거지, 집에서 달아난 소년, 혼자 저녁식사를 하는 사내, 종이담배를 피우는 친구들, 감옥에 갔다온 남자…… 이들에게 따뜻하고 무한한 애정이 깃들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피곤하고 무의미하며 견디기 힘든 삶을 사는 그들의 힘과 본능과 열정을 파베세는 찬양한다. 시인의 온화한 시선은 그 동류의식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시인은 살기 힘든 세상에서 오히려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이들에게서 삶의 신비와 미학을 본다. 절망으로 긷는 희망의 물, 그 역설의 빛깔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 시집이 비관적이고 애조 띤 정조를 자아내는 것은 사랑의 추구와 상실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파베세 개인의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의 이십대를 뒤흔든 여인 바티스티나 피차르도(일명 티나)와의 관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풍경 Ⅳ」나 「만남」 등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파시즘 정권에 항거하던 공산당 지하당원으로, 그는 그녀의 편지를 소지했다가 당국에 발각되어 한동안 이탈리아 남부 바닷가에서 유배를 가야 했다. 사면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가 결혼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은 큰 충격에 빠진다. 초판과 증보 최종판 사이에는 이런 사랑의 아픔이 가로놓여 있다. 이후 파베세는 피안카 가루피, 콘스탄틴 다울링 등 여러 여인에게 연정을 품지만 그 관계가 평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