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당의 특별한 감실(龕室)
서울에서 외떨어진 먼 강릉땅에 대장원인 선교장(船橋莊)을 일으키고 경영하고자 했던 선대의 뜻을 받들어, 오은(鰲隱) 이후(李?, 1773-1832)는 1815년에 열화당(?話堂)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 외형적으로는 그저 작고 아담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대장원 선교장의 식구들이 공동의 뜻을 가꾸면서 인간의 가치를 찾으려던 처소였다. 그 공간은 이른바 사랑채이지만, 기거할 수 있고 집회가 가능하며, 도서관이면서 출판사이기도 했다.
열화당은 1971년 서울에서 현대식 출판사로 거듭난다. 오은거사가 그 뜻깊은 공간을 설립한 지 백오십여 년 만이었다. 강릉 열화당의 역사까지 2015년이면 꼭 이백 년 나이를 맞는다.
2004년에는 출판계가 뜻을 모아 세운 파주땅 출판도시 안에 열화당 새 건물을 지었다. 이 공간 한쪽에 벽감(壁龕)을 마련하고, 오늘의 열화당을 있게 한 분들을 모셨다. 사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선교장 사람들의 작은 얼굴사진 액자를 진열해 놓았고, 다른 한켠에는 열화당 책의 저자들의 얼굴사진 액자들을 진열해 놓았다. 모두가 고인(故人)이므로, 이 공간을 대면하는 이들은 매우 특별한 느낌으로 책을 생각하게 된다.
열화당과 박완서의 인연
최근 이곳에 작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사진을 모셨다.
「나목(裸木)」이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한 박완서가 자신의 첫 장편소설 「나목」을 열화당에서 출간한 것이 1976년, 지금으로부터 삼십육 년 전이다. 당시 열화당은 청진동에 사무실을 개설하여 김병익(金炳翼)이 경영하는 문학과지성사와 공동으로 사용하던 시절로, ‘미술문고’ 시리즈를 선보여 출판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던 때이다. 이듬해에는 그 장소에서 사무실을 세 배 정도 늘렸고, 그때 시인 오규원(吳圭原)이 경영했던 문장사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조학래(趙鶴來)가 경영하던 과학과인간사도 이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문학과지성’ 동인들과의 교유가 시작되었다. 김현, 김병익, 김주연(金柱演), 김치수(金治洙) 등이 그들인데, 이들과의 관계가 박완서로 연결되면서 『나목』이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나목」이 화가 박수근(朴壽根)을 모티프로 하여 씌어졌다는 것도 미술출판을 지향하는 열화당의 색깔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인연은 박완서의 소설집 『창 밖은 봄』(1977)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팔십년대로 접어들어 열화당이 미술출판에 전념하게 되면서 자연히 문학출판이 사라지게 되지만, 1985년 화가 박수근의 이십 주기에 열화당에서 그의 첫 화집을 내면서 박완서는 기꺼이 책 말미에 박수근을 회고하는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을 써 주기도 했다.
인연을 소중히 하는 출판
출판의 본령을 ‘기록’이라 한다면, 그 기록은 ‘기억’을 위한 중요한 매개물이 된다. 저자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이 출판으로 연결되고,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기록이 되고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로 하여 출판사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칠십년대를 열화당과 함께했던 이들, 특히 미술이 아닌 문학으로 함께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그 중 ‘문학과지성’ 동인의 한 사람인 문학평론가 김현, 그리고 작가 박완서는 이제 고인이 되었다. 열화당에서는 1975년에 출간한 김현의 책 『김현 예술기행』을, 그의 이십 주기가 되는 2010년에 기념출판으로 선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출판을 둘러싼 여러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다. 긴 준비기간이었기에 매우 아쉬웠으나, 한 출판사를 있게 한 저자, 특히 이제는 고인이 된 저자를 세월이 흘러 다시금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였다. 그것은 열화당을 처음 세운 오은 선생의 철학을 오늘에 되새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열화당이 지나온 순간 순간들은 오늘의 열화당을 있게 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열화당과 맥을 같이 했던, 박완서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러하기에 그를 온당하게 역사 위에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의 첫 작품이자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나목」을 재조명하는 일로 우리는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으로 삼고자 한다. 작가 박완서를 기억하는 일은 그래서 열화당에게 소중하며, 그 소중함을 담아, 박완서의 일 주기에 즈음하여 그의 첫 소설 『나목』을 기념출판으로 다시금 선보였다. 그리고 8개월 만에 한층 가벼운 모습으로 단장한 보급판을 출간한다.
『나목』―1976년 열화당판을 그대로, 그리고 새롭게 펴내다
“요새도 나는 글이 도무지 안 써져서 절망스러울 때라든가 글 쓰는 일에 넌더리가 날 때는 「나목」을 펴 보는 버릇이 있다. 아무 데나 펴 들고 몇 장 읽어내려 가는 사이에 얄팍한 명예욕, 습관화된 매명(賣名)으로 추하게 굳은 마음이 문득 정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문학에의 때 묻지 않은 동경을 돌이킨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 내 어찌 이 작품을 편애 안 하랴.” ―「작가의 말」 『나목』, 중앙일보사, 1985.
박완서에게 「나목」은 이처럼 각별한 작품이었다. 첫 작품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사십 세의 나이에 쓴 데뷔작이지만, 작가 스스로는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다고 기억한다. 육이오를 배경으로 박수근이라는 가난한 화가를 소재로 삼아 이 소설을 쓴 당시의 심정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 놓지 않으면 견디어낼 수 없었던 일사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 취하지도 않고, 화필(畵筆)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라고.
1976년 열화당판을 그대로 재발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이번에 다시 선보이는 『나목』은 용지, 제본방식, 세로쓰기 등 편집디자인과 제작 면에서 실험적인 시도가 될 것이다.
『나목을 말하다』―『나목』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엮다
『나목』과 함께 발간하는 『나목을 말하다』는 『나목』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으로, 「나목」의 소재가 된 박수근의 그림, 일 주기 기념출판에 부치는 장녀 호원숙의 글 「엄마의 「나목」」을 비롯하여, 그동안 박완서 자신이 「나목」에 관하여 쓴 다섯 편의 글, 「나목」에 관한 평론가 김윤식(金允植)과 김우종(金宇鍾)의 글,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직후 독자들이 보내온 감상문 열한 편, 그리고 작가가 손수 쓴 박완서 연보 등이 실리게 된다. 특히 책 말미에 수록되는 ‘「나목」의 달라진 표현 대조표 1970-1976-2012’는 1970년 여성동아판, 1976년 열화당판, 그리고 오늘의 세계사판, 이 세 가지를 모두 일일이 대조하여, 하나의 소설이 세월에 따라 판본을 달리하면서 작가에 의해 어떻게 표현이 바뀌어 왔는지를 보여 주게 된다. 이는 박완서라는 작가를 연구함에 있어, 작가 자신의 표현의 변천사를 보여 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박완서는 「나목」에서, 한발(旱魃)에 죽은 고목을 희망이 맺힌 나목으로 재발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김윤식의 말처럼 “박완서가 겪은 끔찍한 체험에서 박완서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박완서가 작가가 되는 길밖에 달리 없었”는지도 모른다. 등단 이후 꾸준히 작품을 펴내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야기꾼이 된 그에게, 첫 소설 「나목」은 박완서 창작의 근원으로 영글어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