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 새로운 가족과 결혼을 꿈꾸다
가족과 결혼,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름
가정의 달 5월이다. 멀리는 스승에서 가까이는 어버이와 어린이(자녀)까지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엮이는 인연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통상 가족은 팍팍한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지극한 사랑, 즉 원초적 감정과 정서로 표상되는 긍정적 이미지와 연관되어 왔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횡포를 부리며 더없는 고통을 주는 가장의 지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만혼, 독신의 세계적 증가 추세로 인해 해체나 소멸될 운명이라는 진단까지 받을 정도로 위기를 겪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안식처’로서 의미와 비중이 점차 증대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가족은 우리에게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 생성의 출발점으로서 결혼이 처한 상황 또한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가족의 의미 상실과 여성의 사회 활동의 보편화,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부담 등 때문에 젊은 남녀(특히 여성의 경우)에게 결혼이 가지는 효용이나 매력은 점차 떨어져 가고 있다. 그렇지만 결혼을 통해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서적 만족이나 안식처로서 귀속감에 대한 필요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
근대 한국, 어떤 가족과 어떤 결혼을 희망했는가
일제 강점기의 젊은 세대도 이 같은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과 결혼에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율배반에 당면했던 것이다. 우선 근대적 개인주의 사조의 유입과 여성의 자의식 확산, 경제적 궁핍과 불경기, 도시의 팽창과 식민 영역 바깥으로의 대규모 민족이산 등에 따라 이 시기의 가족과 결혼은 극도의 불안정과 해체 상태를 경험했다. 반면 민족적 시련과 계급적 혼란, 전통적 신분 질서와 지역공동체의 해체, 시민사회의 미성숙(혹은 억압) 등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사회집단의 배태 가능성을 거의 남겨 두지 않았다.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한국의 풍경》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1920~30년대를 대상으로 이 시기 가족 및 결혼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여러 문제 영역들, 예를 들면 결혼과 조혼, 가족과 현모양처, 이혼, 가족의 대안 형태들을 살펴본다. 저자가 2004년 펴낸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의 자매편인 이 책은 구체적으로 가정 내에서 남녀평등의 문제나 여성의 역할에 대한 논쟁, 가부장제와 현모양처주의, 여성의 만혼과 결혼 기피 현상, 성과 정조의 문제, 개인과 가족과 민족(국가)의 상호 관계 등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여성 일반, 특히 교육받은 신여성이 결혼과 가족에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역사적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 같은 문제들은 비단 이 시기에 한정된 쟁점들이 아니다. 따라서 근대 한국의 가족과 결혼에 대한 저자의 탐구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족과 결혼에서 여성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한국
이해 없는 결혼은 하기 싫어요―결혼
타성 타인이 만나 이만치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아끼게 되면 이에 더 행복한 자 어디 있으며, 이에 더 아름답고 귀한 일이 또한 어디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고 체험하고 사량思量하여 이 아름다운 생활을 해 볼 생각이 없는지.
이 책은 개인의 생애사의 순차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1) 결혼, (2) 가족, (3) 이혼, (4) 대안과 비전 이렇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결혼〉의 1장 〈결혼의 이상과 자유결혼〉에서는 서구 근대 사조의 영향을 배경으로 이상적 결혼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통과 근대의 갈등 양상을 검토한다. 이른바 ‘이상적 결혼’은 전통적인 전제결혼이나 매매결혼이 여전히 잔존하던 1920년대 전반기에 특히 사회적인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상적 결혼에 대한 옹호와 비판, 절충이라는 상이한 의견 대립은 1930년대로 이행하면서 보수적이고 통속화되는 방향으로 옮아갔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사랑이라는 이상과 결혼이라는 현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가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나아가 그것은 결혼의 조건을 둘러싼 인식의 변화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2장 〈결혼 과정과 실태〉에서는 중매결혼과 연애결혼, 구식 결혼과 신식 결혼, 여성의 재혼 문제 등을 통해 결혼을 둘러싼 전통과 근대의 대립과 갈등 양상을 제시한다. 이어서 구체적인 통계 자료를 이용하여 결혼 연령의 추이와 결혼의 시기별 추이 등의 기본 사실들을 정리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추이의 변화를 설명하는 다양한 요인들 중에서 경제와 사회, 정치와 같은 변수들을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계 수치들을 같은 시기의 일본이나 대만 혹은 조선 거주 일본인의 사례와 비교해 봄으로써 결혼을 통해 나타난 식민지적 특성이 무엇인지 탐색한다.
결혼에 관한 마지막 주제로는 조혼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3장의 〈조혼〉에서는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당면한 조혼 문제의 의의를 먼저 검토한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 결혼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어 온 조혼이 근대로 이행하면서 특히 지식인들에게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음에도 식민지 시기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존속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조혼의 정의와 실태, 조혼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검토한.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조혼의 유형을 구분한 다음 그와 관련된 여성 범죄의 문제와 아울러 조혼에 대한 지식인들의 대응과 저항 양상을 제시한다.
조선여자에게 시집이라는 것은 인간 지옥이요 감옥―가족
내외란 생활을 함께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 조건에는 빈천과 부귀로 다를 게 없습니다. 물론 생활을 위해서 직업을 가지는 데는 할 수가 없겠지만 직업 이외의 시간은 적어도 아내와 함께 보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한만히 놀기 위해 아내를 저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난폭한 일입니까? 그렇게 해도 좋다는 것은 결국 아내를 밥지어주는 식모나 살림살이를 해주는 세간 청지기와 애를 낳아주는 물건으로밖에 더 알아주지 않는 표적입니다.
제2부 〈가족〉의 4장 〈가족〉에서는 식민지를 무대로 토착적 전통과 서구와 일본, 그리고 양자가 융합된 일본의 근대 가족관이 상호 작용하면서 근대 가족이 출현하는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양상을 제시한다. 또한 근대 가족 안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두 위치, 즉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이 본 근대 가족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비판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 가정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단순히 외부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어 왔다는 주류 인식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 여성 자신의 주관적인 수용과 해석의 과정을 강조한다. 특히 어머니로서 여성, 즉 여성의 모성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급진주의, 사회 ·공산주의 같은 이념의 차이들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5장 〈현모양처〉에서 다루는 현모양처는 이 시기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로 언급되어 온 것이다. 일국에 한정된 고립적이고 미시적인 시각에서 주로 제도사나 교육사 혹은 담론 분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온 기존 연구와 달리 이 책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맥락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다. 나아가 현모양처주의 연구에서 제기된 몇몇 주요 쟁점들, 예를 들면 전통과 근대, 양처와 현모, 강제성과 자발성 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핀다. 아울러 성이나 세대, 계급, 혹은 사회적 입장과 이념 등에 따라 현모양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을 염두에 두고, 현모양처 개념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을 이념의 차이에 따라 제시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급진주의, 사회 ·공산주의의 사상적 정향에 따른 상이한 이해 방식은 6장 〈정조〉에서 논의할 정조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