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과 ‘잉여’로 포착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자화상
한국 사회는 1987년 형식적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 전 사회에 걸쳐 속물화가 전개됐다. 자기 성찰로 현실과 마주하는 진정성의 윤리 대신 성공과 안정이라는 속물 에토스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했다. 한편 돈과 지위와 향락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하는 속물의 행위는 잉여를 낳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강압적 경쟁 체제에서 속물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온갖 자기 계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경쟁에서 탈락한 자들에게는 냉소주의와 ‘잉여짓’으로 대표되는 잉여의 에토스가 깃들었다.
‘속물’과 ‘잉여’는 21세기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두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속물 또는 잉여를 키워드로 삼아 1990년대 이후 변화한 한국 사회의 정서와 체질을 포착한 아홉 편의 논문을 묶고, 머리글을 덧붙였다. 속물과 잉여란 수사는 우리 사회를 비추는, 나아가 현실의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다. 독자들로선 논문마다 조금씩 달리 등장하는 속물 또는 잉여와 조우하면서 그들의 실체에 점차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속물과 잉여란 누구인가?
속물 : 체제 내에 포섭되어 축적하고 소비하는 주체다. 재산과 지위를 축적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다. 생존력이 매우 질기고 거짓말도 잘한다. 위선자와 졸부 중에 많았으나 이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만큼 대세가 되었다. 비록 악덕 소유자이지만 악의 화신이 될 만한 힘과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선한 윤리의 힘든 경로를 추구할 진정성도 갖고 있지 않다.
잉여 : 속물 대열에 가담하여 속물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 자들 가운데 속물 되기를 유예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체제 안에서 살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체제에 포섭된 비듬 같은 존재다. 주로 인터넷에서 패러디를 즐기지만 심하게 인정 경쟁에 빠져들면 현실로 걸어 나와 엽기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한다. 최근 이들이 하는 ‘잉여짓’이 정보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386 속물에서 이태백 잉여까지, 잉여짓에서 자기 계발 열풍까지
사회학자, 인류학자, 문화연구자, 국문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각기 다양한 이론과 방법으로 한국 사회의 속물성을 진단하고 잉여 문화를 해부한다. 논문들은 물론 학술적이고 때론 현실 비판적이다. 연구 대상에서 세대로는 속물화한 386세대와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는 청년 세대를 아우르고, 현상으로는 그들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잉여짓과 자기 계발 열풍 등을 포함한다.
각 논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87년 체제의 붕괴와 속물 에토스, 워킹푸어의 보편화와 소셜미디어의 성장, 학벌 사회의 잉여 인간과 젊은 층의 보수화, 청년들의 냉소주의와 병맛 만화의 인기,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자기계발서 열풍, 노동시장 유연화와 정보테크놀로지의 확산, 청년 백수와 기타 사회적 약자의 연대, 신자유주의 체제와 자유주의적 생활 방식 등으로 다양하다. 언뜻 별개의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논문을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이들 현상이 서로 밀접하게 엮이어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속물 문제는 속물만의 문제가 아니고, 잉여 문제는 잉여만의 문제가 아니다. 속물과 잉여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고, 이 상호 관계는 신자유주의의 자기 관리 기술과 정보자본주의의 자동 축적 기술이 결합할 때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속물과 잉여란 문학적 수사의 힘
속물과 잉여는 물론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수사에 가깝다. 그러나 1980년대를 풍미했던 ‘민중’이란 용어처럼 어떤 국면에서는 문학적 상상력이 던져주는 울림이 사회과학적 개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도식적 이해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한 시대의 유효한 논의는 단어에서 출발해 과도적인 담론 과정을 거쳐 개념으로 상승한다. 속물이나 잉여는 아직까지는 묘사나 재현을 위한 단어이지만 그것이 다른 실천들과 맞물릴 때는 이 시대의 주요 담론으로 될 수도 있다.
[책의 특징...'논문선' 기획 취지]
‘논문선’이란? 잉여를 꿰어 살아 있는 책을 만들다
매년 수많은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고 축적된다. 나름 의미 있고 훌륭한 논문들도 많다. 하지만 글쓴이와 심사자 범위를 넘어 독자에게 전달되는 논문은 많지 않다. 축적된 논문들은 읽히지 않은 채 잉여로 넘친다. 그래서 잉여 논문을 꿰어 살아 있는 책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이 책은 바로 그 같은 욕망에서 출발한 ‘논문선’이라는 기획물의 첫 권이다. 이미 발표된 논문을 어떤 주제와 문제의식을 갖고 선별하여 배치함으로써 우수한 논문이 좀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후 주제를 바꿔 ‘논문선’을 계속 펴낼 계획이다.
읽지 않는 논문들, 찾지 않는 논문들
현재 한국연구재단의 등재 학술지는 후보학술지를 포함해 2,100종이 넘는다. 1990년대 등재지 정책 이후 많은 논문이 학술지에 실렸다. 학술 논문의 수가 늘어난 것은 물론 다루는 주제와 내용의 폭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파편처럼 흩어져 논문을 인용하려는 사람 이외는 별로 찾지 않게 되었다. 지식인들 간 논쟁도 사라지고 논문의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대중과 만남을 주선하던 계간지들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논문과 대중의 접촉점도 엷어졌다. 미디어 환경을 포함해 세상이 많이 바뀐 탓이다. 인터넷 블로그나 학술 논문 데이터베이스가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리 신통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논문 큐레이션 서비스를 통한 학문과 대중의 새로운 만남
우선 ‘논문선’은 특정 주제에 대한 현재의 논의 내용을 보여 준다. 책으로 묶인 논문들은 해당 주제에 대한 현재의 연구 경향과 연구 수준을 드러내 줄 것이다. 이를 통해 서로 쪼개져 있는 분과 학문들이 서로 이야기를 걸고 주제를 심화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
또한 ‘논문선’은 연구자 간 상호 소통을 확산한다. 전공 분야와 경력을 가로지르며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고 활발한 논쟁을 통해 논문으로 현실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문선’은 전문 논문도 대중과 만날 수 있고, 또 만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일반 독자로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좋은 논문이 있더라도 그것을 직접 찾아 읽기 어렵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가 주제별로 논문을 선별해 제공한다면 필요한 논문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논문 큐레이션 서비스라 할 수 있다.
책의 구성_논문 내용
백욱인은 속물과 잉여의 발생 배경과 상호 관계를 살피고, 지금 우리에게서 속물과 잉여 담론이 갖는 실천적 의미를 새긴다. 또한 수많은 학술 논문들이 읽히지 않은 채 잉여로 흘러넘치는 시대에 이를 꿰어 한 권의 책으로 ‘논문선’을 펴내는 취지도 밝힌다.
김홍중은 87년 에토스 체제의 핵심을 진정성으로 파악하고, 이후 한국 사회의 에토스 변화를 탐색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 87년을 지배하는 에토스는 타인 지향적인 몰염치의 속물화이며, 그것은 곧 성찰적이고 주체적인 근대적 인간의 해체를 의미한다.
김상민은 잉여 탄생의 물적 기반, 조건, 환경을 연구하고, 이 새로운 주체 혹은 존재·행동 방식이 어떻게 우리 삶을 관통하는지 밝혀낸다. 그에 따르면 잉여는 정보 테크놀로지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며 동시에 그 양자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다.
한윤형은 학벌 사회의 잉여 인간들이 빠져 드는 루저 문화에 대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루저 감성은 정치적인 각성과 자기 학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그는 새로운 것이 없음을 자각하는 ‘냉소’라는 정서에서 정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