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와 더불어 유럽 기호학을 창시한 그레마스
알지르다스 쥘리엥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 1917~1992)는 프로프,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옐름슬레우 등의 영향으로 구조주의적인 시각의 기호학을 정립해 바르트와 함께 유럽 기호학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대학자이다. 주요 저서로는 『기호학』(사전), 『구조의미론』, 『의미에 관하여』 등이 있다. 그레마스는 행위소 모델, 기호사각형, 서사 프로그램 등 담화 연구에 더없이 요긴한 분석 도구를 남겼고, 이 도구들은 오늘날까지도 폭넓게 활용된다. 자크 퐁타뉴(Jacques Fontanille 1948~)는 그레마스의 제자로서 ‘담화의 기호학’ 정립에 몰두하고 있다. 『기호학과 문학』, 질베르베르그와 함께 쓴 『담화 기호학』이 주저로 꼽히고, 특히 스승이 작고하기 1년 전에 공저로 발표한 『정념의 기호학』은 그로 하여금 국제적 명성을 얻게 했다.
그레마스의 기호학, 나아가 파리학파의 기호학을 대표하는 명저 『정념의 기호학』
『정념의 기호학』은 『구조의미론』과 더불어 그레마스의 기호학, 나아가서 파리학파의 기호학을 대표하는 명저이다. 그레마스를 중심으로 코케, 프티토, 아리베, 쿠르테스, 퐁타뉴, 플로슈, 질베르베르그, 에노, 베르트랑 등이 주도한 파리학파의 기호학은 『구조의미론』으로 ‘행위’를 기호학적으로 탐구하는 길을 열었고, 『정념의 기호학』으로 ‘정념’을 기호학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정초했다. 그레마스와 퐁타뉴가 정념을 분석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종래의 행위기호학이 제공하는 의미생성 모델만으로는 정념을 완전히 분절하고 범주화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위기호학이 전제하는 기호-서사 층위와 담화 층위에 감각과 기질이 문제되는 선조건 층위를 새롭게 추가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행위기호학과 정념기호학에 대해서는 이 책의 「해제」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정념기호학은 행위기호학의 부정이나 대체가 아니라, 보완이요 발전이다.)
그레마스와 퐁타뉴가 기호학의 무게중심을 행위에서 정념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바타유, 푸코 등의 활약으로 정념이-이 경우 비이성과 광기가-새롭게 주목받는 지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전통 철학은 이성적 사유에 몰두하면서 정념 연구를 기피했었다. 정념이란 의지를 따르지도 않고 이성으로 파악되지도 않는, ‘머리’로 통제할 수 없는 ‘가슴’의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념이 철학이 아니라 문학에서 더욱 풍요롭게 다루어진 것도, 『정념의 기호학』이 문학 텍스트에서 빈번히 사례를 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레마스와 퐁타뉴는 예컨대 질투의 통사법을 구축하기 위해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 로브그리예의 『질투』,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끊임없이 뒤적인다. 『정념의 기호학』을 쓴 지 8년째 되는 1999년에 퐁타뉴가 『기호학과 문학』을 발표한 것은 어쩌면 정념 연구의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정념의 기호학』의 가장 큰 장점은 ‘인색함’, ‘질투’ 등 하나의 정념을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방법론적으로, 계열체적으로 그리고 통합체적으로 정치하게 탐구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질투를 탐구할 때 그레마스와 퐁타뉴는 질투의 사전적인 정의부터 찾는다. 그리고 거기서 애착과 경쟁이라는 감성적 구성요소를 추출한 후, 이번에는 애착과 경쟁을 사전적으로 정의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경쟁심, 시기심, 경계심과 비교하면서 경쟁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규정하고, 애착에서 비롯되는 소유와 배제라는 행동을 분석하면서 애착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애착과 경쟁이라는 질투의 두 구성요소를 탐구한 그레마스와 퐁타뉴가 연이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질투의 통사법인데, 그들은 질투의 통사적 전개 과정을 거시 시퀀스와 미시 시퀀스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예컨대 질투의 발작에 선행하는 감정과 후행하는 감정을 모두 포괄하는 거시 시퀀스는 ‘애착 → 의심 → 질투 → 사랑/증오’라는 네 단계의 정념으로 구성된다. 질투를 탐구하는 명저로는 데카르트의 『정념론』과 바르트의 『사랑 담론의 단상들』도 있지만, 적어도 인식론적이고 방법론적인 구체성에 관한 한 『정념의 기호학』에 필적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