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달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과 과학의 타협, 인습과 혁신의 갈등, 그 숨겨진 역사의 미로 찾기! 미시사(微時史)든 통사(通史)든, 정치사든 생활사든 우리는 역사를 접할 때 연도와 날짜를 중심으로 파악한다.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도 기실은 그 속에서 만들어진다. 헤겔의 '시대정신'과 같은 극도로 추상화되고 고도로 관념화된 개념조차 연도와 날짜에 기반한 역사적 사실(事實)이 없었다면 그 탄생조차 의문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연도와 날짜가 올바른 것일까? <달력과 권력>에 따르면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또 역사 속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연도와 날짜의 경우 시대의 흐름을 부정할 만큼 전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 전제 및 도입부에는 오류의 가능성이 높다. 그 단적인 예로서 제시되는 것이 연도의 문제다. 서기 2000년을 밀레니엄이라 해서 성대하게 기념을 했는데 그것이 과연 21세기의 시작이 맞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현대의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숭배해 마지않는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사라진 '열흘'이라는 시간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曆)은 16세기에 도입되었다. 그런데 그 도입과 함께 시차는 있지만 열흘이라는 시간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로마 역사에서만 본다면 1582년 10월 5일 다음 날이 10월 14일이 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력 이전에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에서는 1년에 11분 42초의 오차가 발생했다. 그 오차는 계속 누적되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달력상의 춘분과 천문학적인 춘분에 열흘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력을 그레고리우스 개혁 달력이라고도 표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구의 자전을 하루, 지구의 공전을 1년으로 삼은 역법(曆法) 규정과 천문학적 관찰상의 차이를 수정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까다로운 윤년 규정(4년에 하루를 추가하되 1700년, 1800년과 같이 100년으로 나누어지는 해에는 하루를 추가하지 않고, 2000년과 같이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에는 원래대로 하루를 추가한다)을 두어 우리의 역법이 제자리를 찾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레고리우스력의 도입과 함께 사라진 열흘에 있다. 이전의 역법과 비교해 철저히 계산해 보면 당시 달력상의 춘분과 천문학상의 춘분에는 12.69일의 차이가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열흘만 없애고도 달력상의 춘분과 천문학상의 춘분이 일치하게 되었다. 과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물론 그와 관련된 가설은 많다. 하지만 천문학적 관찰이나 수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현대의 건강한 상식에 입각해 보면 역사의 신빙성 자체에 의심의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지금은 2000년이 아닌 1593년에서 1718년 사이의 어느 해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온다. 그레고리우스력의 도입 때 열흘을 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생긴 날짜의 오차는 최소 9.51일에서 최대 10.49일이다. 이전의 역법과 비교해 계산한 12.69일과는 최소 2.20일에서 최대 3.18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1년에 0.00780121일이다. 따라서 대략 282년(2.20 / 0.00780121)에서 407년(3.18 / 0.00780121)의 오차가 역사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그것을 현대에 적용하면 지금은 2000년이 아닌 1593년에서 1718년 사이의 어느 해일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많은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선 그 많은 종말론의 진위를 아직은 판가름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종말의 해는 아직 최소 200년 최대 400년 정도 남은 셈이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이야기도 '신앙'의 문제나 설교상의 '비유'라고 도외시하기도 어렵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재단하는 우(愚)를 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의 달력 개혁은 최후의 심판 때문? '달력'이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학구적, 과학적 논의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달력은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곤 했다. 그레고리우스력의 도입 과정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력은 도입 이후 가톨릭 국가들에 보급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주도로 도입된 새 달력을 비난하는 온갖 종류의 문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가난한 농부의 인생에서 열흘을 훔쳐간 데 대한 분노는 물론 언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진 떠돌이 일꾼들의 한탄과 "교황은 최후 심판의 날이 곧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달력을 고쳤다. 그는 새로운 달력으로 그리스도를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언제 최후의 심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며, 이로써 교황은 간악한 행위를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교황의 새로운 달력에 대한 두 마이센 농부의 짧은 대담> 1584년 독일)는 다소 '시사적인' 해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담겨 있었다. 200년에 걸친 달력을 둘러싼 갈등과 혼선 사회적으로도 혼선이 거듭됐다. 지역별로 두 개의 달력이 동시에 사용되면서 일상생활은 물론 국제 무역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서로 가리키는 날짜가 달랐기 때문이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가 섞여서 사는 지역에서는 '희한한' 일도 종종 벌어졌다. 가톨릭 가정에서는 수난절(受難節)이 시작되었는데 개신교도들은 사육제(謝肉祭)를 즐기고 있는가 하면, 개신교도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금식을 하고 있는데 가톨릭교도들은 성당에서 기쁜 마음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식이었다. 이런 현상은 근 200년에 걸쳐 계속됐다. 그동안 '달력에 관한 한' 사회적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힘 앞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논외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달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즉위에 따라 연호를 붙이는 방식과 같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따라 햇수를 세는 것 역시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도량형을 10진법을 기초로 통일하였는데 시간에는 도입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우리의 축제가 200년 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따라서 정해져야 하는가? 새로운 시민 권력은 완전히 새롭고 현대적인 그리고 과학적 현상과 걸맞은 달력을 만들어야 한다"며 10진법에 입각한 새 달력을 만들어 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7일에 하루씩 놀던 것이 10일에 하루 쉬는 데 대한 민중들의 반발에서 대외 교역상의 애로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 탓이었다. 그러니 보다 불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파쇼 달력(무솔로니가 개인적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제정), 소비에트 달력(스탈린이 경제적 목적에서 제정)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진 것 정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소박한 집필 동기에서 시작하였으나 여기까지만 보면 <달력과 권력>은 '달력'을 소재로 한 과학사이자 '달력과 권력' 사이의 갈등과 봉합 과정을 그린 사회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초 저자의 집필 동기는 단순했다. 서문에 적혀 있듯이 어느 날 잡지 퀴즈를 풀다가 시작된 이 집필 작업은 "도대체 우리는 왜 달력이 필요한가? 그것도 매년 새것으로. 우리 스케줄이 해마다 일정하면 달력은 하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구구단을 외듯 쉽게 머리에 담을 수 있도록 달력을 단순하게 만들면 보다 편리하지 않을까? 왜 새해는 꼭 1월 1일에 시작될까?"와 같은 소박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날짜나 요일을 확인하기 위해 힐끗 보면 그만인 달력의 '근거'를 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