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관객

자크 랑시에르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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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템포러리 총서 3권. 랑시에르가 지적 해방의 사유와 오늘날 관객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교육의 문제를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겨 사유하는 지적 모험을 펼쳤다. <해방된 관객>은 <무지한 스승>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모험담으로, 지적 불평등의 고리, 지적 해방의 사유를 연극과 관객이라는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해 오늘날 '해방된 관객', '평등한 관객'의 자리를 찾는다. 랑시에르는 관객이 하는 것은 결국 '주의'라고, 주의란 시선이나 청취를 끌고 감으로써 관객이 제 고유의 저작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고 전했다. 다시 말해, 관객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읽거나 보거나 들은 것이 낳은 새로운 가능태들에 의거해 관객이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는 조건들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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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I. 해방된 관객 II. 비판적 사유의 재난 III. 정치적 예술의 역설 IV.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 V. 생각에 잠긴 이미지 텍스트 출전 부록: 미학적 전복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Description

“관객은 이미 해방된 존재이다.” 추구되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전제되어야 할 정치적 원칙이다.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앎과 무지, 능동과 수동의 위치라는 전제에 대한 미학적 전복 예술가와 관객, 창작자/생산자와 향유자/소비자 사이 지적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실천 교육, 정치, 문학, 영화, 미술 등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하는 자리옮김의 철학자 랑시에르가 동시대 예술에 제기하는 ‘지적 해방’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비판적 사유 1.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적 해방의 사유와 오늘날 관객에 관한 물음 사이에 아무런 뚜렷한 관계도 없다는 것이 또한 기회인 듯 보였다” :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 랑시에르가 말하는 관객의 해방 / 해방된 관객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출판사가 문학의 해석에 있어 엄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문학은 해석하는 자의 자유와 역량 위에서 시시각각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제제는 출판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전시장에 가면 작품에 손대지 마세요, 라는 경고문을 보게 됩니다. 왜 손대지 말아야 할까요.” “아이유 ‘제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을 출판사가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이 시대에 웬만큼 무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망발이죠.” 작년, 외국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모티프로 삼은 가수 아이유의 신곡 「제제」가 낳은 소아성애 논란을 둘러싸고 해당 출판사와 [그들 스스로 관객이기도 한] 한 작가[예술가] 및 두 비평가가 작품과 관객을 사이에 두고 SNS에서 벌인 설전이다. 수동적이며 무지하다고 전제되는 관객들 혹은 구경꾼들은 이 같은 설전에 대해, 작품과 자신들 사이를 ‘매개’하는 ‘스승’의 ‘설명’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할까? 한국을 찾기도 했던 랑시에르가 이 설전에 코멘트를 요청받았다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해방된 관객』은 랑시에르가 지적 해방의 사유와 오늘날 관객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책이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에 관한 다섯 가지 교훈』(1987)에서 교육의 문제를 지적 능력(지능)의 평등이라는 철학적·정치적 문제로 옮겨 사유하는 지적 모험을 펼쳤다. 그는 ‘무지한 스승의 테마’를 가지고 관객에 대해 논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요청에 답하는 『해방된 관객』은 『무지한 스승』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모험담으로, 지적 불평등의 고리, 지적 해방의 사유를 연극과 관객이라는 예술(연극, 회화, 사진, 영화, 비디오, 퍼포먼스 등)의 영역으로 확장해 오늘날 ‘해방된 관객’, ‘평등한 관객’의 자리를 찾는다. [『해방된 관객』의 한국어판 역시 『무지한 스승』을 옮긴 양창렬 번역가가 맡았다.] 지능의 불평등이 교육학의 신화이듯, 관객의 수동성이 고전 연극 패러다임의 불평등주의적 전제에 지나지 않다면,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품을 지각하고 해석하고 비교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관객은 그 자체로 이미 해방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관객이 어떻게 해방되는가라는 물음은 관객의 해방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하기에 잘못 제기된 물음은 아닌가? 『무지한 스승』의 도식을 예술에 적용하는 『해방된 관객』에서 해방하는 스승에 해당하는 심급이 존재하는가? 관객 자체가 이미 해방되어 있다면 관객이 작품을 만나 개인적 모험을 하며 자신의 역량을 증대하는지 혹은 그런 역량의 발휘를 가로막는 제도나 장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무용해지지 않는가? 랑시에르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의문을 해소한다. 관객이 하는 것은 결국 ‘주의’라고, 주의란 시선이나 청취를 끌고 감으로써 관객이 제 고유의 저작을 만들어내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어떤 작업의 결과물 앞에 있는 자가 그 결과물을 전유하여 제 것으로 만들 때 해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이 있다는 사실에, 그림을 바라본다는 사실에 그 자체로 해방의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시선을 이끄는 가운데 해방이 있으며,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갖는 측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요컨대 “관객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읽거나 보거나 들은 것이 낳은 새로운 가능태들에 의거해 관객이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는 조건들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2. “관객이 된다는 것”―“아무나에게 속하는 느끼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이다 연극에서 배우(acteur)와 관객(spectateur)은 그 단어의 로마 어원이 가리키듯 각각 능동적인 행위자(actor)와 수동적인 구경꾼(spectator)을 말한다. 행위/인식과 보기의 구분이 연극에 뿌리 깊이 박힌 것이다. 이러한 나눔에 답하는 몇 가지 정식이 있다. 플라톤은 연극이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을 비판하며 연극을 폐지하고 무용 공동체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연극 안에서 배우와 관객의 동일시/정체화를 방해하고 관객이 ‘인식하는’ 관찰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앙토냉 아르토는 관객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연극 안에 ‘참여’하여 생의 에너지를 얻는 구성원으로 만든다. 브레히트와 아르토의 방식은 대립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두 연극 개혁자는 모두 연극이라는 매개를 이용해 플라톤이 하고자 했던 것, 즉 관객을 능동적 존재로 변환하기를 이뤄내려 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배우와 관객 사이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기획이 전자의 능동성과 후자의 수동성이라는 근본 전제를 되풀이하는 한에서만 유지되며, 이것이 『무지한 스승』의 ‘불평등의 고리’, ‘바보 만들기’와 닮아 있다고 본다. 해방은 보기와 행위 사이의 대립이 의문에 부쳐질 때 시작된다. 해방은 말하고, 보고, 행하는 관계들을 구조 짓는 명증성들 자체가 지배와 예속의 구조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때 시작된다. 해방은 보기 역시 이 위치 분배를 확인하거나 변형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 관객 역시 학생이나 학자처럼 행위한다. 관객은 관찰하고 선별하고 비교하고 해석한다. 관객은 자신이 본 것을 그가 다른 무대에서, 다른 종류의 장소에서 보았던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한다. 관객은 자기 앞에 있는 시의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만의 시를 짓는다. 관객은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퍼포먼스를 자기 방식대로 다시 하면서, 예를 들어 퍼포먼스가 전달한다고 간주되는 생의 에너지를 회피하면서 퍼포먼스를 단순한 이미지로 만들고 이 단순한 이미지를 자신이 책에서 읽었거나 꿈꾸었던, 자신이 겪었거나 지어냈던 이야기와 연결시키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관객은 거리를 둔 구경꾼인 동시에 자신에게 제시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이다.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배우나 극작가, 연출가, 무용수 또는 퍼포머가 하듯 관객들이 그들 나름의 시를 짓는 만큼, 관객들도 뭔가를 보고 느끼고 이해한다. 극작가나 연출가는 관객이 이러한 것을 보고, 저러한 것을 느끼고,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저러한 결론을 끌어내길 바랄지 모른다. 이것이 바보를 만드는 교육자의 논리요, [어떤 것이] 동일하게 똑바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3. 관객의 역설―관객은 무지한 자, 수동적인 자라는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관객의 주체적 역량: 아무나의 지적인 평등에서 출발하는 감성적[미학적] 해방―해방된 관객, 민주주의적 인민 ‘보는 자는 볼 줄 모른다.’ 이 전제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관통한다. 관객의 해방이란―이러한 전제와 달리―관객이 자신이 본 것을 보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이 뭔가를 하는 능력이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혹자는 맹인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함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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