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투라’는 서체의 이름이다.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는 이 한 서체가 기술과 상업, 취향과 편의, 의미와 은유의 힘을 입고 현대인의 삶 구석구석으로 침투해온 여정을 추적한다. ‘푸투라’라는 이름이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투라 서체를 본 적 없는 현대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이키, 데이비드 핀처, 바바라 크루거, 게릴라걸스, 보그, 루이비통, 스위스항공, 폭스뉴스, 앱솔루트보드카, 이케아, 폭스바겐, 독일 사민당, 영국 보수당, USA 투데이, 토마 피케티, 휴렛팩커드, NASA, 러시아 연방우주공사 등이 만들고 펴낸 물건과 광고, 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서체는 문화전쟁의 최전선
푸투라는 1920년대 독일 디자이너 파울 레너가 만든 활자체다. 손글씨에 근간한 기존 활자체와 달리, 원, 삼각형, 사각형, 직선 등 기초적인 기하 형태로 만든 푸투라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방식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1920년대 독일에서 활자체는 문화전쟁의 최전선이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중세 손글씨체를 본뜬 블랙레터를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겼다. 개혁주의자들은 민족성이 짙은 서체는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6쪽 이하).
미국을 점령한 독일 서체
푸투라는 현대성과 진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미국의 인쇄업자, 디자이너, 광고주들을 매혹시켰다. 독일에 뿌리를 둔 서체였음에도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기에 이른다. 거의 똑같이 생긴 복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원본의 명성을 드높인 경우였다. 지금도 오픈소스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푸투라 서체 역시 미국산 복제품인 스파르탄이다. 유럽에서는 유일무이한 모델도 시장을 주도하는 서체도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기하학적 산세리프체의 전범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서 실험적으로 생산된 제품이 미국에서 상업적으로 수용되면서 20세기 문화의 상징이 된 푸투라의 여정은 유럽발 모더니즘 문화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와 선거가 사랑한 서체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블랙레터를, 공산당은 푸투라를 서체로 사용했다(62, 65쪽). 그러나 독일 정체성을 구현한다고 여긴 블랙레터가 원래 유대인이 사용하던 서체라고 밝혀지자, 1941년 나치 정부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블랙레터 사용을 금하고 푸투라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다. 일례로 1941년 발행된 유대인 게토 허가증의 표제에 푸투라가 사용되었다(67쪽).
정치나 선거 캠페인에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푸투라를 사용한 것은 독일만이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푸투라는 널리 사용된 대표적인 서체였다.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이 맞붙은 1952년과 1956년, 케네디와 존슨이 경쟁한 1960년, 케네디와 골드워터의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푸투라를 사용했다(71쪽)
우주로 간 가장 익숙한 서체
우주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나사는 우주여행 계획에 푸투라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대단히 복잡하고 제한적인 우주비행선의 실내, 달에서 사용될 하셀블라드 카메라에 붙은 사용 설명 스티커, 임무 차트와 지도 등에 푸투라가 사용된 것이다. 나사의 복잡한 시스템에 획의 굵기가 다르고 장식용 세리프가 있는 서체가 사용되었다고 상상해보라. 푸투라는 나사에 시각적 통일성과 간결함을 부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푸투라가 당시 가장 흔하고 무난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푸투라와 그 복제품은 어느 인쇄소에서 다 보유하고 있었기에, 많은 이들의 협력과 제조사가 모두 다른 제품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우주비행선 프로젝트에 사용하기에 푸투라보다 적합한 서체는 없었다. 1960년대 말 푸투라는 미국 문화의 기본 요소로 자리 잡는다(91쪽).
유명 브랜드가 사용한 서체
푸투라를 사용한 문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익숙한 것은 나이키의 JUST DO IT일 것이다. 나이키는 수십 년간 광고에 푸투라를 사용해왔고, 푸투라 엑스트라 볼드 컨덴스드는 “JUST DO IT”은 슬로건만큼이나 즉각적으로 나이키를 떠올리게 하는 서체가 되었다. 광고에 푸투라가 자주 등장하자, 1992년 ‘푸투라 엑스트라 볼드 컨덴스드에 반대하는 아트디렉터들’이라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130쪽). 나이키 이외에도 푸투라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려는 브랜드의 리스트는 길게 이어진다. 저자는 “야생의 푸투라”라는 섹션을 마련해 거리와 쇼핑몰에서 만날 수 있는 푸투라를 소개한다(103~119쪽). 돌체&가바나 역시 푸투라를 사랑하는 브랜드다. 최근 인종차별 광고로 중국에서 퇴출되기에 이르자 돌체&가바나는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푸투라로 조판되어 있을 정도다.
최근 국내에서도 서체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서체가 곧 아이덴티티임을 깨달은 여러 기업들은 자사의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고(아모레 등), 새로운 상업용 서체 개발을 위한 클라우드 펀딩에 관한 열기도 뜨겁다. 명조, 고딕, 궁서 등으로만 분류되던 서체가 제 이름을 찾아가는 중이다. 서체가 정치, 경제, 문화와 서체가 어떻게 얽혀 들어가고 사용되는지를 풍부한 시각 자료와 함께 설명하는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는 서체와 디자인, 나아가 20세기 문화에 관심 있는 이에게 대단히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