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국가는 무엇 때문에 갈등하고 분열하는가?
정체성의 선(線)으로 살펴본
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의 서로 다른 길
많은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맞이했다. 엇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독립이지만 이들 국가가 걸어온 근대화의 길은 제각기 다르다. 일부 신생 독립국들은 여전히 갈등과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K 문화, 경제 성장 등 여러 면에서 비교적 주목할 만한 역사 경로를 거쳐왔다.
그렇다면 독립 이후 이들 국가의 근대화 과정은 무엇이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아직도 많은 아시아 신생 독립국에서는 여전히 내부 갈등과 균열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이와 비교해 대한민국은 어떤 경로와 과정을 통해 지금의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이루었을까?
이 책은 아시아 신생 독립국 네 나라(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근현대사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들과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 예외주의’의 근대화 과정을 깊이 있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국가 내부의 정체성 선 긋기와 선 지우기가 국가 발전에 얼마나 유효한 영향을 미치는지, 아울러 앞으로 경계하고 논의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함정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본다.
왜 그들은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없는가?
단 한 번도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던 적 없는 다양한 종족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국가가 된다면? 단일 민족 국가를 당연시 여겨온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이 이 같은 다종족 국가를 이루고 있다. 식민 종주국이 임의대로 그어놓은 선에 의해 종족과 종교가 서로 얽히고설킨 가운데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국민이 되기를 강요받았고, 이는 국가 균열을 일으키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의 선을 만들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는 ‘정체성의 선(線)’이다. 아시아의 많은 신생 독립국들은 이 정체성의 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국가에서는 종족, 종교, 문화, 이념 등으로 나뉜 다양한 정체성의 선이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한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모적이고 긴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통합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결국 힘을 앞세운 군부 정권의 성장을 도왔고, 특정 지역과 커뮤니티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후견주의라는 패악을 낳았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의 근대화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시아 국가, 그중에서도 공산화되지 않은 국가를 기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그 대상이다. 대한민국과 출발 배경이 달랐던 이들 국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현대사를 지나고 있다. 이 책은 그 과정과 배경을 ‘정체성의 선’이라는 흥미로운 관점과 시선으로 짚어본다.
탈식민지 아시아 국가들의 선 긋기와 선 지우기
갈등과 혼란이 끊이지 않은 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의 가장 큰 과제는 국민들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국가 내부의 선을 긋고 지우는 일은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정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라는 운동장 위의 선을 어떻게 변경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과정에서 선으로 나뉜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차별과 대립이 발생한다.
인도는 카스트 정치가 강화된 모습을 보이며 힌두민족주의와 무슬림의 대립 구도가 나라 전체를 갈라놓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발루치스탄과 파슈툰의 분리 독립에 대응해 이를 억누르기 위한 군부 세력이 정치와 경제에 깊숙이 관여한다. 인도네시아는 1만 8천 개에 달하는 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다종족 국가로, 수하르토 체제 이후 지방 자치가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의 힘이 약해지고 파편화된 법질서로 민주주의의 동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이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에 대한 여러 특혜로 인해 정치적 불만이 쌓이고 말레이계의 기득권과 말레이시아인이라는 하나의 국민으로서의 평등을 내세우는 개혁 세력의 대립이 갈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선 지우기에 실패한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후견주의와 정치 세습이 국가 발전의 발목을 강하게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겉으로는 민주주의 제도를 표방하지만 실제 민주주의의 내용 면에서는 여전히 뒷걸음질 치는 모양새이다.
한국 예외주의와 함정
대한민국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아시아의 다른 신생 독립국들과는 확연히 다른 근대사의 궤적을 갖고 있다. 뚜렷한 기원이 없는 다른 아시아 신생 독립국과 달리, 우리는 일찌감치 천 년이 넘는 중앙집권국가의 경험을 갖고 있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빨리 전근대 민족국가를 이루었다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이 책은 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중앙집권 시스템이 어떻게 정착되고 발전해 왔는지를 역사적 고증을 통해 살펴본다. 정체성의 선이 여럿 나뉘어진 앞선 국가들과 달리, 우리는 중앙집권체계 아래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한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한민족 고유의 민족주의 정신은 일본의 억압과 동화정책에 맞서 강렬한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를 갖고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소모적인 절차와 과정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제약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정착을 앞당겼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균질한 근대화는 모든 국민이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 되었다.
물론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가 앞으로도 무조건 장밋빛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근대화나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진 지금, SNS의 발달로 등장한 가짜뉴스, 배제와 혐오로 나타나는 정치적 부족주의라는 선(線)은 언제든 우리 사회를 균열시킬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