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재능을 꽃피운 문인화가 정선
당대의 예술을 품고 진경산수로 나아가다
저자는 겸재 예술의 여정을 세 시기로 나눈다. 첫째는 진경산수를 개척해가는 모색기(60세 이전), 둘째는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하는 확립기(60대), 그리고 셋째는 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원숙기(70대 이후)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겸재의 예술은 오히려 노년에 빛을 발했다. 84세라는 오늘날로 쳐도 초고령의 나이까지 붓을 놓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우다 별세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면 누구나 놀라게 된다. 모색기가 60세 이전이라는 사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60세라는 요즘으로 쳐도 은퇴할 연령에 겸재 예술은 오히려 청년의 활력을 지니고 정점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바로 이 모색기를 다룬다. 겸재는 20대는 물론 30대 전반까지도 특별한 이력이나 화력을 보이지 않았다. 제작시기가 알려진 첫 작품은 36세 때인 1711년(신묘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12년(임진년)에 다시 금강산을 유람한 뒤 《해악전신첩》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그 전까지는 한 동네에서 교유했던 장동 김씨 김창흡으로부터 학문을, 그의 형제 김창업 등으로부터 회화의 기본기를 배우고, 장동 김씨 가옥과 사천 이병연 등 동학들의 수장품들을 보면서 회화세계를 넓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유명 화본을 교과서로 삼아 열심히 보고 베끼면서 연마한 것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이렇게 평가한다.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작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그것은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국제적(보편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고전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 그 점에서 겸재는 대기만성형의 대가였다.(51~52면)
겸재는 이처럼 착실히 수련과 연찬을 거치면서 어느 시점 우리나라의 고루한 화풍을 일소하고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내보였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작품이 이른바 ‘득의산수’로 불리는 〈하경산수도〉다. 훗날 표암 강세황이 “겸재 중년의 최득의작”이라고 평한 이 그림은 정형화되고 관념적인 산수화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겸재가 중년에 예술적으로 추구하고 고뇌하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앞선 조선의 화가들이 추구한 절파(浙派)풍의 전통, 그리고 당대에 중국 화보를 통해 들어온 남종문인화법의 화풍, 여기에 그가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진경산수의 개성이 결합되어 말 그대로 득의작(작가가 뜻한 대로 이루어진 명작)을 이룬 것이다.
진경산수화로 나아가는 길은 처음부터 완벽하진 않았지만 이 역시 겸재답게 한발씩 전진했다. 《신묘년 풍악도첩》의 〈금강내산총도〉 같은 금강산도는 그가 노년에 그린 〈금강전도〉와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화가의 그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다르다. 유홍준 관장은 그것이 새로운 시도의 초년작이 갖는 한계이자 특징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그전 조선의 미미한 사생산수(실경산수) 전통을 고려한다면 이 그림들은 겸재가 새로운 전통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는 진경산수의 창안자이자 완성자인 셈이다. 이후 겸재는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며 국토를 탐방하고 진경산수를 남겼다. 그 여정은 《해악전신첩》(37세), 《사계산수화첩》(44세), 《구학첩》(56세)을 거치며 확립되었고,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널리 퍼졌다. 관아재 조영석은 유명한 「《구학첩》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겸재의 위상을 알렸다.
원백(정선)의 이 화첩은 먹을 사용함에는 흔적이 없으면서 번지기에는 법도가 있다. 깊고 울창하며 윤택하고 빼어나 거의 송나라 미불과 명나라 동기창 같은 대가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만하니, 조선 300년 역사 속에서 대개 이와 같은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노년에 절정을 이룬 예술
명작을 남기고 명예를 얻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60세를 넘기면 세상을 떠나거나 만년기로 들어가지만, 겸재는 오히려 전성기를 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경교명승첩》 《연강임술첩》 〈박연폭도〉 등이 모두 60대, 70대의 작품이니 노년의 20년간이 겸재 예술의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겸재는 몇 차례의 영남 지역 지방관 벼슬을 마무리하고 주로 서울 인근에서 관직을 얻거나 활동했다. 본래 연고였던 서울에서 다시금 절친한 예술가 및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생산하게 된 듯하다. 이 중에서 겸재의 생애 최고의 역작이자 그의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국보 〈금강전도〉와 국보 〈인왕제색도〉라고 할 수 있다.
〈금강전도〉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부감법의 시각으로 장쾌한 구도를 펼쳐 보이는 그림이다. 대단히 치밀한 세부 묘사에 더해 유머 감각까지 보여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겸재는 30대 이후로 수차례 금강산을 오르내리며 이 작품을 포함해 여러 점의 금강산 작품을 그렸고, 그 정점으로 국보 〈금강전도〉를 남긴 것이다. 저자는 이 그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금강전도〉는 이처럼 수직과 수평, 선과 점, 흰색과 검은색, 밝음과 어둠, 큰 것과 작은 것 등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상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변형과 과장, 필법(筆法)의 강약, 광선의 대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압도하는 화면을 창출해냈다. (…) 비록 자연의 입장에서는 ‘틀린’ 것이지만 그림의 입장에서는 ‘맞는’ 것이고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감동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25면)
이 그림은 그림 속 글귀 때문에 한동안 1734년(59세)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어왔지만 이 글귀가 겸재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저자는 이 그림의 화풍을 고려했을 때 겸재 70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1751년(신미년), 76세의 겸재는 생애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거주지였던 인곡정사 너머로 인왕산의 모습을 오직 먹으로 그린 이 대작은 겸재 만년의 원숙미가 뿜어져 나오는 진경산수의 절정이라고 저자는 평가한다. 이 작품은 비안개 걷히며 환히 드러나는 인왕산의 준수한 자태를 거의 영웅적인 감정으로 보여준다. 바위 봉우리의 미끄러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몇 겹으로 붓질을 가하는 ‘중묵의 찰필(擦筆)’을 행했고, 그 붓길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내리긋되 각도만 달리하여 나타냄으로써 인왕산 바위 봉우리의 양감과 질감, 음영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좌우의 산봉우리들이 햇살에 반사되는 밝은 모습은 흰빛으로 나타내어 짙은 먹빛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흔연히 어우러지고 있다.
70대에 절정의 작품들을 창조한 겸재는 만년에 관복까지 겹치며 행복한 노년을 보냈다. 81세의 나이에 뒤늦게 종2품 동지중추부사(당상관)까지 승진한 겸재는 세상의 영예를 누리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겸재의 가장 큰 복은 건강이었다. 80대에도 안경을 쓰고 작은 사물까지 묘사했을 정도로 노익장을 자랑하며 84세까지 천수를 다하도록 건필을 보였다. 〈노송영지도〉와 같이 기품이 넘치는 나무 그림뿐 아니라 일생에 걸쳐 세 번째로 그린 《장동8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년의 명작’으로 저자가 평가한 〈강진고사도〉 등도 이 시기의 건재함을 증명하는 작품들이다. 겸재의 동료들도 장수한 경우가 많아 노년의 예술가들의 애틋한 우정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렇게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예술가 반열에 오른 겸재는 후학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기고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새로 쓰는 화인열전’ 시리즈는 계속된다
인간학으로서 미술사를 위하여
이 책의 별미 중 하나는 책 뒤쪽에 실린 부록이다
구레송
4.0
믿고 읽는 유홍준작가님의 작품 그동안 몰랐던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됐다 작년에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보고 와서인지 더욱 와닿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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